소책자 『낙태냐 피임이냐?』로 소련식 낙태 합법화를 알린 독일 공산당의 산부인과 의사
1929년 펴낸 소책자 『낙태냐 피임이냐?』는 1931년 15만 부가 찍혔으나, 망명한 소련에서 낙태 금지에 환멸을 느꼈고 1938년 남편이 처형된 뒤 이듬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뢰네에서 소상인과 여성운동가의 딸로 태어난 독일의 산부인과 의사·작가. 1914년 베를린에서 의학 공부를 마치고 1차 세계대전 때 야전병원에서 일한 뒤 베를린 니더쇠네바이데에서 개업했다. 남편 로타어 볼프와 함께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며 적색 여성·소녀 동맹을 함께 세웠고, 소련을 본보기로 낙태 합법화를 주장한 소책자 『낙태냐 피임이냐?』를 냈다. 1928~1933년 프로이센 의회와 제국의회 선거에 공산당 후보로 나섰다. 1933년 2월 모스크바로 망명했으나 1938년 남편이 「게슈타포 간첩」으로 처형되었고, 1939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낙태냐 피임이냐?』와 모스크바의 환멸
소상인 막스 루벤과 여성운동가 레기나 루벤의 딸로 태어났다. 아비투어를 마친 뒤 베를린에서 의학을 공부해 1914년 마쳤고 1915년 박사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야전병원에서 일했고, 전쟁이 끝난 뒤 베를린 니더쇠네바이데에 산부인과 의원을 열었다. 여성운동가로서 노동자 여성을 위해 일했다. 남편 로타어 볼프와 함께 공산당의 열성 당원이었고 적색 여성·소녀 동맹의 공동 창립자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남편과 함께 『두 의사의 모스크바 스케치』(1926), 『캅카스의 독일 의사들』(1928), 『파시스트의 나라』(1932) 같은 소련·이탈리아 여행기를 펴냈다. 낙태에 관한 책과 글에서는 소련이 본보기가 되는 태도를 보였다고 썼고, 프리드리히 볼프가 서문을 쓴 1929년 소책자 『낙태냐 피임이냐?』는 1931년까지 6판, 15만 부가 찍혔다. 1930년에는 『산아 조절 문제의 지침: 소비에트 러시아 인구 정책의 성과』를 냈다. 이름난 공산주의자로서 1928년 프로이센 의회 선거와 1930~1933년 제국의회 선거에 후보로 나섰다. 1933년 2월 남편과 가족은 루가노와 파리를 거쳐 모스크바로 달아났다. 그는 그곳에서 다시 의사로 일했으나 자리를 잃었고, 바뀐 낙태법에 환멸을 느꼈다. 1938년 남편이 「게슈타포 간첩」으로 체포·처형된 뒤 오랜 구직 끝에 간호사로, 이어 다시 의사로 일했지만, 1939년 8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들 발터는 2차 세계대전 때 노동군과 붉은 군대에 끌려가 1943년 전사했다. 1997년부터 베를린 알트글리니케의 한 거리가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