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위기 속 군중을 달래러 보내진 멘셰비키 노동장관
1917년 4월 20일, 밀류코프의 각서에 격분한 15,000명의 무장 군중이 마린스키궁 앞에 집결하자, 고츠와 함께 파견된 스코벨레프는 그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바쿠의 유복한 몰로칸 상인 가문 출신으로, 빈에서 트로츠키의 『프라우다』 편집을 도우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2월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에 올랐고, 4월 위기 때 고츠와 함께 마린스키궁 앞 군중을 진정시키러 파견되었으며, 5월 5일 제1차 연립정부 노동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혁명에 반대했으나 1922년 귀국·입당하여 대외무역 분야에서 일했고, 대숙청 속에 1938년 총살당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03RSDLP 입당, 바쿠 노동자 파업 지도
- 1906–1912빈 망명, 트로츠키의 『프라우다』 편집, 빈 공과대학 졸업(1912)
- 1912–1917제4두마 의원(자캅카스 러시아인 대표), 멘셰비키파
- 1917.2–5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 집행위원
- 1917.5–9임시정부 노동장관, VTsIK 부의장(6월~)
- 1919–1920바쿠 거주, 적군 식량 지원 활동
- 1920–1925프랑스·영국 망명, 비공식 소련 무역대표
- 1925–1937대외무역인민위원부·국가계획위원회·전연방라디오위원회 근무
관련 역사 사건
두마 대의원과 전시 바쿠 파업 (1912-1917)
1912년 여름 스코벨레프는 고향인 카프카스로 돌아가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제4국가두마(1912-1917) 대의원이 되었다. 그는 곧 두마 사회민주당 의원단 내 멘셰비키 파벌의 지도자 니콜라이 치헤이제의 영향 아래 들어가, 1912-1913년 볼셰비키 의원들을 분리시켜 별도 파벌을 만들려던 망명 볼셰비키 지도부(레닌,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에 맞서 치헤이제를 지지했다. 1913년 중반 의원단이 마침내 분열된 뒤, 두 사람은 사회주의 통일을 유지하도록 볼셰비키 의원들에게 압력을 넣기 위해 1913년 12월 1일 국제사회주의사무국 런던 회의에 갔으나 끝내 성과를 내지 못했다. 러시아 제국 의회에서 그는 주로 예산과 경제 문제를 다루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코벨레프는 치헤이제와 함께 전쟁 수행을 잠정적으로 지지하면서도 러시아 정부의 내정과 전쟁 수행 방식을 비판하는 입장(방어파)을 취했고, 왕을 비판하면서도 전쟁에서의 패배를 공개적으로 주장하지는 않고 전쟁을 승리로 끝내는 것을 과제로 내걸었다. 1914년 여름에는 바쿠 석유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도했다. 이 파업은 바쿠 유전에서 전쟁 전 가장 강력한 파업으로 번져 석유 생산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1915년에는 바쿠의 노동자 신문에 실린 기사로 4개월간 감옥에 갇혔으나 의원 자격은 유지되었다.
1917년 2월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지도부에 들어가 처음에는 의장을 맡았고, 3월 7일에는 임시정부와 정책을 조율하는 소비에트 연락위원회의 창립 위원 5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3월 12일에는 치헤이제를 의장으로 하는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