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이 1세

Mihai I
루마니아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루마니아 루마니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 1921–2017 ↓ 퇴위 강요 후 망명

1944년 8월 23일 안토네스쿠를 체포해 루마니아를 연합국 편으로 돌리고, 1947년 총구 앞에서 퇴위한 마지막 국왕

1947년 12월 30일 아침, 병력이 둘러싼 왕궁에서 그로자와 게오르기우데지는 퇴위 문서를 내밀었다. 거부하면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구금 중인 학생 1천 명이 총살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미하이는 망명 뒤 증언했다. 그날 오후 의회는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의 카롤 왕세자와 그리스의 엘레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왕위 계승을 포기한 탓에 1927년 여섯 살에 섭정 아래 국왕이 되었고 1930년 카롤 2세가 귀국해 왕위를 되찾자 왕세자로 내려왔다. 1940년 9월 안토네스쿠가 카롤 2세를 퇴위시키자 열여덟 살에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은 안토네스쿠의 독재와 추축국 동맹에 있었다. 1944년 8월 23일 붉은 군대가 국경을 넘은 뒤 그는 궁정 쿠데타로 안토네스쿠를 체포하고 연합국과 휴전해 루마니아를 대독 전선으로 돌렸고, 이 공으로 소련의 승리훈장을 받은 극소수의 외국인이 되었다. 그러나 1945년 3월 비신스키의 압박으로 그로자 정부를 임명해야 했고, 그해 8월부터 법령 서명을 거부하는 「국왕 파업」으로 맞섰으나 1946년 조작 선거와 1947년 마니우 재판을 막지 못했다. 1947년 12월 30일 그로자와 게오르기우데지가 강요한 퇴위 문서에 서명했고 같은 날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48년 국적을 박탈당한 채 영국과 스위스에서 시험 비행사와 증권 중개인으로 살았으며, 1992년 부활절의 첫 귀국 때 부쿠레슈티에 백만 명이 모였다. 1997년 국적을 되찾았고 2017년 스위스에서 죽어 쿠르테아데아르제시의 왕가 묘지에 국장으로 안장되었다.

다른 이름: 루마니아 국왕 미하이 1세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망명기의 결혼과 왕가 계승 문제

퇴위를 앞둔 1947년 11월, 런던에서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마운트배튼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부르봉파르므 가의 안을 만났다. 안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군에 자원해 알제리·모로코·이탈리아 등지에서 구급차 운전병으로 복무하고 프랑스 무공훈장을 받았다. 두 사람은 1948년 6월 10일 아테네 왕궁의 즉위실에서 결혼했다. 가톨릭 교회법상 안은 비가톨릭 신자와 결혼하려면 교황청의 면제가 필요했고, 교황 비오 12세는 자녀를 가톨릭으로 키우라는 조건을 붙였다. 미하이는 이것이 루마니아 왕정 헌법에 어긋난다며 거부했고, 면제 없이 정교회 의식으로 올린 결혼은 가톨릭 교회법상 무효로 남았다. 두 사람은 1966년 11월 9일 모나코에서 가톨릭 의식을 다시 치렀다.

두 사람은 1949년부터 1964년까지 다섯 딸을 두었고, 피렌체와 로잔, 영국 하트퍼드셔를 거쳐 1956년부터 제네바 인근 베르수아에 자리 잡았다. 2007년 12월 30일 퇴위 60주년에 미하이는 왕가의 기본 규칙에 서명해 장녀 마르가레타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이 문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제도를 규율하는 것이어서 법적 효력이 없었다. 2011년 5월에는 독일 호엔촐레른 가문과의 왕조적·역사적 유대를 끊고 가문 이름을 ‘루마니아’로 바꾸었다. 2014년에는 불법 도박 사업 혐의를 인정한 셋째 딸 이리나의 왕실 칭호를 박탈하고 계승권에서 제외했고, 2015년에는 손자 니콜라스 메드포스밀스의 칭호와 계승권도 박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