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에치스와프 프란치셰크 라코프스키

Mieczysław Franciszek Rakowski
폴란드 폴란드 1926–2008 ○ 암

1989년 선거에서 국민이 거부한 폴란드의 마지막 공산당 총리

1983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연대노조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바웬사가 '수상, 폴란드인끼리 이야기합시다'라고 하자 라코프스키는 '박사와 박사로서 이야기합시다'라고 답했다.

폴란드 통일노동당(PZPR)의 개혁파 정치인이자 『폴리티카』 주간의 편집장을 24년간 맡은 언론인이다. 1988년 10월 총리가 되어 원탁회의와 경제개혁(일명 빌체크법)을 추진했으나, 1989년 6월 4일 선거에서 전국명부에 올랐음에도 50%를 넘지 못해 낙선하며 체제의 민낯을 드러낸 인물이 되었다. 선거 참패 후 PZPR의 마지막 제1서기가 되어 1990년 1월 당 해산을 주재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81~1985년 부총리와 계엄

1981년 2월 세임은 라코프스키를 야루젤스키 내각의 부총리로 임명했다. 같은 해 3월 19일 비드고슈치 사건 뒤 그는 연대가 예고한 총파업을 철회시키는 협상에 참여했고, 그 결과 비드고슈치에서 진압에 나섰던 경찰관들이 문책되었으며 농민연대의 합법성이 인정되고 3월 30일 총파업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후 몇 달 동안 그는 연대를 협상 상대가 아니라 강경한 정치적 적대 세력으로 취급했다. 1981년 7~8월의 단식 행진 무렵 그는 처음으로 계엄의 위험을 거론하며 계엄이 사회 불안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보았고, 그때까지 그를 자유주의자로 보던 서방 언론은 그를 당 독점 유지론자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1981년 11월 계엄 준비 작업에 참여했으며, 12월 12일 계엄 시행 일정을 통보받고 12일에서 13일로 넘어가는 밤을 국무회의 의사당에서 보냈다. 계엄 시행 후에는 헝가리 1956년의 전례를 들어 PZPR을 해산하거나 활동을 정지시킬 것을 주장했으나, 야루젤스키는 폴란드의 당이 아직 조직과 일정한 정치적 역량을 유지하고 있다며 반대했다. 그는 계엄에 회의를 품으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이를 지지하고 옹호했다. 계엄 초기 그에게 맡겨진 임무 가운데 하나는 배우들의 텔레비전 보이콧을 해소하는 것이었고, 그는 정지된 폴란드연극예술가협회를 복원하도록 야루젤스키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82년 9월에는 『폴리티카』 편집장직에서 물러났고, 1985년 11월 부총리직에서 해임되어 세임 부의장이 되었다.

계엄은 1981년 12월 13일부터 1983년 7월 22일까지 시행되었다. 비헌법적 군사 통치 기구인 국가구원군사평의회(WRON)가 수립되었고, 수천 명의 야당 활동가들이 재판 없이 구금되었으며, 1981년 12월 16일 부예크 탄광 진압에서 광부 9명이 사망했다. 계엄 기간 사망자는 91명으로 집계되지만 이 수치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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