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전선을 지휘하고 백군 의용군의 기초를 놓은 차르의 마지막 참모총장
1917년 3월 2일, 알렉세예프는 전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권고 전보를 한데 모아 차르에게 전송하며 '폐하께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옵니다… 왕위에서 물러나소서'라고 썼다.
러시아 제국군의 참모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을 맡아 동부전선 전체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갈리치아 공세를 입안하고 1915년 대후퇴를 조직적으로 이끌어 러시아군을 붕괴에서 구한 전략가였으며, 2월 혁명 당시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요구 전보를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해 퇴위를 이끌어냈다. 혁명 후 남러시아에서 의용군의 모체인 '알렉세예프 조직'을 창설해 백군 운동의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놓았으나, 내전이 본격화되기 전 병으로 사망했다.
경력 연표
- 1876–189064 카잔 연대 장교,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니콜라이 참모아카데미 수석 졸업
- 1890–1904참모본부 근무, 니콜라이 아카데미 교수
- 1904–1905제3 만주군 병참총감 (러일전쟁)
- 1908–1912키예프 군관구 참모장
- 1912–1914제13 군단장
- 1914–1915남서전선 참모장 (갈리치아 공세 입안)
- 1915북서전선 총사령관, 대후퇴 조직적 지휘
- 1915–1917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 — 전 러시아군 실질적 총지휘
- 1917 3–5월임시정부 최고사령관
- 1917–1918의용군(알렉세예프 조직) 창설자·최고지도자
관련 역사 사건
제1차 세계대전: 갈리치아에서 스타프카까지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알렉세예프는 남서전선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사령관 니콜라이 이바노프는 명목상의 지휘관이었고, 작전 기획과 전선 운용의 실질적 결정은 알렉세예프가 내렸다. 그가 입안한 갈리치아 공세(1914년 8~9월)는 4개 야전군을 동원한 대규모 포위 기동으로,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격파하고 동갈리치아 전역과 렘베르크(르비우)를 점령했다. 이 승리로 알렉세예프는 4등 성 게오르기 훈장과 보병대장 진급을 받았다. 이어 1914년 12월 카르파티아 공세를 기획했고 1915년 3월 프셰미실 요새를 함락시켰다.
1915년 5월 독일군이 고를리체에서 러시아 전선을 돌파하자, 북서전선 총사령관이 된 알렉세예프는 폴란드 돌출부에서 '대후퇴'를 조직적으로 지휘했다. 바르샤바와 브레스트-리토프스크를 내주면서도 부대의 전투 서열을 유지했고, 지연전으로 적의 진격을 늦추며 "전선이 안정될 때까지 후퇴를 계속하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중앙열강군의 포위 위협 속에서도 러시아군은 궤멸을 면했다.
1915년 8월 니콜라이 2세가 친히 최고사령관직을 맡자 알렉세예프는 스타프카 참모총장이 되었다. 차르가 군사적 결정을 전적으로 위임함으로써, 알렉세예프는 1917년 3월까지 15개월간 러시아 제국군 전체의 실질적 총지휘관으로서 작전, 보급, 연합국 전략 조율을 총괄했다. 매일 아침 차르와 수 시간 동안 전황을 검토했으며, 모든 전략 명령은 그의 지시로 하달되었다.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를 승인하고 연합군에 발칸 전선 공세를 거듭 요청했으며, 프랑스 총사령관 조프르는 연합작전 계획에서 알렉세예프와 직접 교신했다.
그러나 전쟁 초기 2년간의 과로는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부하에게 사소한 일조차 위임하지 않고 직접 전략 업무를 수행하는 성격으로 유명했던 알렉세예프는, 1916년 11월 신장병으로 쓰러져 이듬해 2월까지 크림에서 요양했다. 그가 1917년 2월 19일(구력) 스타프카로 복귀했을 때, 페트로그라드에는 이미 혁명의 기운이 가득했다.
알렉세예프 조직과 의용군의 탄생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권력을 장악했을 때, 알렉세예프는 갈레르나야 거리의 한 아파트에 머물며 반볼셰비키 저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10월 22일(구력) 그는 스몰렌스크의 아내에게 "한 번도 내 영혼을 이렇게 짓누르는 절망이 없었다… 배신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썼다. 볼셰비키 봉기 당일, 알렉세예프는 예비의회 회의에 참석하려 마린스키 궁전으로 향했으나 입장을 거부당했고, 이내 시내에 그를 체포하라는 전단이 붙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시민 복장으로 변장한 뒤, 낡은 다크 초콜릿색 코트에 검은 바지, 파란 펠트 모자를 눌러쓴 모습으로 11월 12일 밤 로스토프행 기차에 올랐다. 여권은 은퇴한 추밀고문관의 명의였다.
11월 15일, 알렉세예프는 돈 코사크의 수도 노보체르카스크에 도착했다. 아타만 알렉세이 칼레딘은 그에게 "일주일 이상 머물지 말라"고 냉담하게 말했지만, 알렉세예프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11월 2일(구력) 이미 그는 장교들에게 "조국을 구하라"는 호소문을 발표했고, 11월 8일에는 두호닌 장군의 참모장이었던 디테리흐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방울의 기름에서 반점이 퍼져 나가듯" 작은 거점에서 전국적 저항으로 확장해 나가겠다는 비전을 밝혔다.
알렉세예프 조직의 첫 본거지는 노보체르카스크의 바로치나야 거리 39번지 2번 진료소였다. 11월 4일 최초의 장교중대가 편성되었고, 가입자는 4개월 복무 계약에 서명했다. 초기 지원자는 대부분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장교와 사관생도, 학생들이었으며, 첫 달에는 하루 75~80명이 합류했다. 봉급은 없이 배급만 지급되다가 이후 장교에게 월 100루블(1918년 3월에는 270루블로 인상)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11월 중순이 되면 장교중대, 사관생도대대, 미하일롭스코-콘스탄티놉스카야 포대, 게오르기 중대, 학생분견대 등으로 편제가 확대되었다. 11월 말, 이 작은 부대는 이미 로스토프에서 붉은위병 부대를 몰아내는 첫 전투 작전을 수행했다.
12월 6일(구력), 비호프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과 참모들이 노보체르카스크에 도착했다. 이로써 알렉세예프 조직은 의용군으로 재편되었다. 코르닐로프가 군사 지휘권을 맡고, 알렉세예프는 정치·재정·외교 부문을 총괄하는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며, 안톤 데니킨이 제1사단을 맡았다. 두 지도자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알렉세예프가 1917년 9월 코르닐로프를 체포한 일이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었고, 배경과 성격도 크게 달랐다. 데니킨의 기록에 따르면 "협력이 쉽지 않을 것임이 첫 순간부터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세예프는 내전기 내내 의용군과 백군 전체의 정치적 기초를 유지하는 데 헌신했고, 1918년 9월 우파국가회의에서 전러시아 임시정부(지도부)의 부지도자로 추대되었으나 10월 8일 폐렴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