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본치-브루예비치

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Бонч-Бруевич
소련 러시아 1870–1956 ○ 자연사

볼셰비키에 합류한 첫 제국군 장성으로 적군 창설을 지휘한 군사지도자

그는 훗날 회고했다. '나는 이성보다는 본능으로 볼셰비키에게 끌렸다. 러시아를 붕괴와 완전한 파멸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그들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국 육군 소장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최초의 고위 장교로, 최고군사위원회 군사지도자(1918)와 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1919)을 맡아 적군의 초기 조직을 지휘했다. 독일군 총공세에 레닌의 긴급 소환을 받고 페트로그라드로 달려가 나르바-프스코프 방어선을 설정했으며, 구 제국 장교들을 군사전문가로 대거 기용하는 제도를 주도했다. 전간기에는 소련 최초의 측지국을 창설했고, 스탈린 시기 두 차례 체포되었으나 살아남아 1944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적군 창설과 군사전문가 제도

1918년 3월 4일, 레닌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최고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본치-브루예비치를 군사지도자(военрук)로 임명했다. 구 제국군 참모총장을 지낸 그가 이끄는 최고군사위원회는 사실상 신생 적군의 첫 중앙군사기관이었으며, 트로츠키가 군사·해군 인민위원으로 취임하기 직전의 공백기에서 적군 조직화의 초석을 놓았다.

본치-브루예비치의 핵심 구상은 두 가지였다. 첫째,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차폐'(завеса) 방어체계였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 결렬 후 독일군이 전면 공세에 나서자, 그는 레닌의 긴급 소환을 받고 1918년 2월 22일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해 나르바-프스코프-비텝스크-오르샤를 잇는 방어선을 설정했다. 이 선은 이후 1918년 11월까지 소비에트 러시아의 사실상 서부 국경선이 되었다.

둘째, 구 제국 장교단을 대규모로 기용하는 '군사전문가'(военспец) 제도의 주창자였다. 그는 차폐 부대의 지휘관으로 옛 장교들을 임명했고, 이들이 내전의 내부전선보다 외부의 독일군을 막는 방어선에서 복무하는 쪽을 더 수용할 것이라고 보았다. 1918년 말까지 적군 장교단의 약 75%가 구 제국군 출신이었으며, 정치위원 제도와 병행된 이 군사전문가 제도는 적군의 전투력을 급속히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본치-브루예비치는 같은 해 6월 본인의 참모부가 머물던 무롬이 '조국과 자유 수호 동맹'의 반란군에 점령당할 뻔한 사건 이후 점차 영향력을 상실했고, 8월 27일 군사지도자 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을 잠시 맡았으나, 총사령관 이오아킴 바체티스와의 불화로 7주 만에 물러났다. 그럼에도 그가 구축한 차폐 체계와 군사전문가 제도는 트로츠키에 의해 확대·제도화되어 남북전쟁기 적군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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