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G의 공동 창립자: 공산당에 가입한 적 없는 소련 최고의 전투기 설계자
1913년 툴루즈 항공학교, 구레비치의 동급생은 마르셀 블로크였다. 30년 후 한쪽은 MiG-15, 다른 쪽은 미라주를 설계하여 냉전 하늘에서 맞서게 될 두 유대인 전투기 설계자가 같은 교실에 앉아 있었다.
쿠르스크 지방 유대인 가정 출신. 차르 시절 혁명 활동으로 하리코프 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프랑스에서 항공공학을 수학했다. 1939년 아르툠 미코얀과 OKB-155(MiG)를 공동 창립, 부수석설계자(1939–1957)와 수석설계자(1957–1964)로 MiG-1부터 MiG-25까지 참여했다. MiG-3는 독소전 초기 주력기, MiG-15는 한국전쟁 제공권을 장악, MiG-25는 현역 최고속 요격기로 남았다. 사회주의노동영웅·6회 스탈린상·레닌상 수상. 평생 비당원이었던 유일한 최고위 군수설계자.
경력 연표
- 1910–11아흐티르카 김나지움 은메달 졸업, 하리코프 대학 입학 — 혁명 활동으로 퇴학·추방
- 1912–14몽펠리에 대학·툴루즈 SUPAERO 수학, 마르셀 다쏘와 동급생
- 1917–25하리코프 공과대학 항공공학 졸업, 글라이더 «부메랑»·«황새» 설계
- 1929–37모스크바 각 설계국 근무, 1936–37년 미국 더글러스사 공장 파견
- 1939–57OKB-155(MiG) 공동 창립, 부수석설계자 — MiG-1·MiG-3·MiG-9·MiG-15
- 1957–64OKB-155 수석설계자 — MiG-17·MiG-19·MiG-21·MiG-25; 무인·순항미사일 개발
관련 역사 사건
미코얀과의 동업 — MiG의 탄생
미하일 구레비치와 아르툠 미코얀의 조합은 소련 군수산업에서 가장 이례적인 동업이었다. 미코얀은 아나스타스 미코얀 정치국원의 동생이자 당원인 아르메니아인이었고, 구레비치는 평생 당에 가입하지 않은 유대인 기술자였다. 두 사람은 1937년 니콜라이 폴리카르포프 설계국에서 처음 만났다. 1939년 12월, 스탈린의 직접 승인 아래 폴리카르포프 설계국에서 분리된 특별설계부(OKO)가 신설되었고, 미코얀이 수장, 구레비치가 부수석설계자를 맡았다. 이 부서는 곧 OKB-155로 개편되어 'MiG'라는 약칭(미코얀과 구레비치의 머리글자)으로 소련 전투기 설계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실무에서 두 사람의 역할은 뚜렷이 나뉘었다. 미코얀은 당과 군부를 상대하는 정치적 얼굴이자 총괄 책임자였고, 구레비치는 계산과 구조설계에 천착한 실무 수석이었다. 동료들은 구레비치를 두고 "자에 집착하는 완벽주의자"라 불렀으며, 그가 남긴 수백 장의 수계산 노트는 오늘날에도 MiG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다. 당에 가입하지 않은 유대인이 소련 최고 군수 프로젝트의 중추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특히 1940년대 후반 반코스모폴리탄 캠페인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미코얀의 정치적 방패와 구레비치의 대체 불가능한 기술적 역량이 결합한 결과였다. 1957년 구레비치가 정식 수석설계자로 승진한 뒤에도 두 사람의 업무 분담은 변하지 않았고, 이 체제는 MiG-25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