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세묘노비치 호진

Михаил Семёнович Хоз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79 ○ 자연사

레닌그라드 봉쇄의 첫 겨울을 지휘하고, 제2충격군 상실로 경질된 소련 상장

스타프카는 1942년 6월 8일 그를 해임하며 "서류 중심의 관료적 부대 관리와 부대와의 단절로 제2충격군의 통신선이 차단되어 예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고 적었다.

미하일 호진은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적군에 들어가 내전을 치렀다. 1938년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9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을 거쳐, 독소전 발발 후 주코프를 따라 레닌그라드 전선으로 가 참모장과 제54군 사령관을 겸임했다. 1941년 10월 주코프가 떠난 뒤 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이 되어 첫 봉쇄 겨울의 방어와 티흐빈 공세를 지휘했으나, 1942년 6월 제2충격군을 포위에서 구출하지 못한 책임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제33군, 제20군 사령관 등 현장 지휘를 거쳐 전후에는 군사교육 기관을 이끌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극지성» 작전과 두 번째 해임(1943)

1942년 6월 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에서 물러난 뒤에도 호진은 야전 지휘에서 완전히 밀려나지는 않았다. 그는 제33군과 제20군 사령관을 거쳐 1943년 1월 19일 상장으로 진급했고, 이어 북서 방면에서 벌어진 대규모 공세의 한 축을 맡았다.

1943년 1월 18일 레닌그라드 봉쇄가 부분적으로 뚫리자 스타프카는 북서 방면 전체로 공세 규모를 확대했다. 이 구상은 «극지성»이라는 암호명을 얻었으며, 목표는 독일 북부 집단군을 포위·섬멸하고 레닌그라드 주를 완전히 해방하는 것이었다. 북서 전선과, 1월 30일 별도로 편성된 호진의 특별집단에 주역이 맡겨졌고 레닌그라드 전선과 볼호프 전선은 이를 돕는 역할이었다. 작전은 2월부터 4월까지 이어졌고, 데먀н스크와 스타라야 루사 방면의 공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3개 전선과 특별집단의 협동 공격은 목표를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이어진 시기에도 호진의 지휘 이력은 순탄치 않았다. 1943년 3월부터 12월까지 그는 북서 전선과 서부 전선의 부사령관으로 재직하며 3~4월의 르제프-뱌즈마 작전에 참가했고, 그 후 오룔을 점령한 독일군 후방으로 투입될 제11군 편성을 준비했다. 그러나 1943년 12월 8일 그는 «무활동과 업무에 대한 경솔한 태도»를 이유로 서부 전선 부사령관직에서 다시 해임되어 국방인민위원회 인사총국의 처분에 맡겨졌다. 같은 달부터 그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고, 스몰렌스크와 모스크바 근교 바르비하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1944년 3월 프리볼가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어 전선에 보낼 예비군 양성에 종사하면서 야전 지휘 생활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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