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즈네프 시대 '2인자 당 이데올로그'
1964년 10월, 프라하의 소련 대사관. 지먀닌은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크렘린 쿠데타의 성공을 자랑했다. 상대는 흐루쇼프의 아내 니나였다. '친애하는 레오니트 일리치가 제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니나는 그 순간 남편의 실각을 알게 되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당 관료로, 11년간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 언론의 방향을 통제했다. 1976년 중앙위 서기에 올라 수슬로프의 지휘 아래 과학·교육·문화·체육·매체 전반을 관장하는 이념 제2인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기 후반 보수적 이념 통제의 핵심 집행자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2년차인 1987년 퇴진할 때까지 당 선전 기구의 연속성을 체현한 인물이다.
경력 연표
- 1940–1946벨라루스 공산청년동맹(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활동 지도
- 1946–1953벨라루스 공산당 제2서기 겸 교육장관, 당내 간부로 급성장
- 1956–1965주베트남 대사, 외교부 극동국장,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역임
- 1965–1976『프라우다』 편집장 겸 소련 언론인동맹 이사장 — 최장 재임
- 1976–1987중앙위 서기, 수슬로프 아래 이념 전반 총괄
- 1987건강 사유로 퇴진, 연금 생활
관련 역사 사건
강경 이데올로그와 벨라루스의 역설
지먀닌은 1965년 『프라우다』 편집장에 취임한 뒤 급속히 강경 노선으로 기울었다. 1967년 10월 레닌그라드 언론인 비공개 회의에서 그는 솔제니친을 두고 "정신적으로 비정상이며 분열증 환자"라고 공격했고, 망명 작가 발레리 타르시스는 "미치광이"로, 예브게니 예브투셴코와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 같은 시인들도 "체제에 대한 원한을 품은 자들"로 몰아붙였다. 이 무렵 연구자 니콜라이 미트로힌의 분석에 따르면, 지먀닌은 1960년대 말 상대적 당내 자유주의 노선에서 "상당히 적극적인 러시아 민족주의"로 급선회했다.
이러한 이념적 경직성은 벨라루스 문제에서도 복잡한 굴절을 보였다. 그는 벨라루스 민족주의의 어떤 표현에도 타협 없는 투쟁을 벌인 표트르 마셰로프와 깊은 반목 관계에 있었다. 마셰로프와 달리 지먀닌은 벨라루스 작가 바실 비코프를 '벨라루스 고유의 독창적 문학가(самобытчик)'로 보아 전적으로 후원했으며, 이 점에서 당내 벨라루스계 간부로서의 또 다른 면모를 드러냈다.
1976년 중앙위 서기로 승진한 후에도 그의 강경함은 흔들리지 않았다. 1985년 8월 정치국 회의에서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아내 옐레나 본네르의 해외 여행 허용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지먀닌은 "본네르는 치마 입은 짐승이며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공개 발언했다. 빅토르 아파나시예프는 회고록에서 지먀닌을 "수슬로프 다음 가는 브레즈네프 시대 제2의 당 이데올로그"로 평하면서도, 그가 "무례하고 입이 거친 인물"로도 알려져 있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