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메시 미클로시

Gimes Miklós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 1917–1958 ✕ 처형

너지 임레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진 개혁파 언론인

《머저르 서버처그》 창간호에서 '오직 이 길로만 우리는 독립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헝가리를 세울 수 있다'고 썼다.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헝가리 언론인으로,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종전 후 당 기관지 《사바드 네프》의 기자가 되었고, 초기에는 라코시 체제에 충실한 논객이었다. 슬란스키 재판과 모스크바 의사 사건을 목격하며 신념이 흔들렸고, 1955년 러이크 라슬로의 복권을 요구했다가 당에서 제명되었다. 1956년 혁명 당시 너지 임레 측근 중 가장 급진적인 인물로 《머저르 서버처그》를 창간·편집했으며, 소련군 개입 후에도 카다르 정권을 거부하고 지하 신문과 민주독립운동을 이끌다 체포되어 너지, 말레테르와 함께 사형당했다. 1989년 복권되어 같은 날 엄숙히 재매장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비공개 재판, 처형과 1989년 명예 회복

1956년 12월 5일 체포된 기메시는 너지 임레 사건의 제3순위 피고인이 되었다.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비다 페렌츠가 이끄는 대법원 인민재판부가 1958년 6월 15일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같은 날 너지 임레와 말레테르 펄에게도 사형이, 도나트 페렌츠 등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은 다음 날 새벽 부다페스트 집중교도소 뜰에서 집행되었는데, 이때 기메시의 나이는 마흔 살이었다.

유해는 곧바로 무명의 무덤에 묻혔고, 1961년 2월 24일에는 비밀리에 파내어 라코시케레스투르 신공동묘지 301호 구역의 가짜 이름이 붙은 무덤으로 옮겨졌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카다르 체제는 1956년을 '반혁명'으로 규정하고 너지와 그 동료들을 반혁명분자로 매도했다. 그러나 1988년부터 이 규정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포즈거이 임레가 1956년을 '민중봉기'로 다시 규정하면서 너지 임레의 명예 회복이 정치적 과제가 되었다.

1989년 5월 기메시는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그해 6월 16일, 처형 31년 만에 같은 날짜에 너지 임레, 말레테르 펄, 실라지 요제프, 로숀치 게저와 함께 영웅광장에서 엄숙하게 재매장되었다. 이 행사에는 약 20만 명이 참석했고, 텔레비전이 하루 종일 생중계했다. 재매장된 다섯 사람 중 기메시의 이름을 부르며 그와 함께 신문을 만들었던 언론인 몰나르 미클로시가 추도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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