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만 나자프 오글루 나리마노프

Нариман Наджаф оглы Нариманов
소련 아제르바이잔 1870–1925 ○ 심장마비

계몽 문학에서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수장으로

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사후의 명예 회복과 유산

나리마노프가 192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트로츠키는 이를 "레닌 다음으로 동방 세계에 가장 큰 손실"이라 불렀고 오르조니키제는 그를 "동방에서 우리 당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라고 평했다. 그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된 유일한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장례식에는 칼리닌, 카메네프 등 소련 지도부가 참석했으나 정작 아제르바이잔 대표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예조프시나(대숙청) 시기에 나리마노프는 사후에 '민족주의자'로 낙인찍혔다. 훔메트 출신 인사들 전체가 '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공격받았고, 그의 저작과 정치적 유산은 공식 서사에서 지워졌다. 스탈린 사후 1953년에야 분위기가 다소 완화되었으나, 1959년까지도 당의 공식 입장은 나리마노프의 역할을 축소하고 대신 샤우먄을 아제르바이잔 혁명의 중심 인물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완전한 복권은 1972년에야 이루어졌다. 이후 바쿠에 나리마노프 기념비(1972), 기념 박물관(1977)이 세워졌고, 아제르바이잔 의과대학, 바쿠 지하철 역, 여러 거리와 공원, 아스트라한주의 한 도시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의 외동아들 나자프는 1938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키예프 군사통신학교를 졸업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드네프르 전투에 참전한 뒤 1944년 우크라이나 볼노바하 근처에서 전사했다. 미르자 이브라기모프의 소설 「페르바네」, 영화 「별은 꺼지지 않는다」(1971) 등이 그의 삶을 다루었으며, 그의 유산은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건국 서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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