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움 이사코비치 에이팅곤

Наум Исаакович Эйтинго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9–1981 ○ 자연사, 모스크바

트로츠키 암살과 원자력 첩보를 설계한 소련 최고의 암약 지휘관

1940년 8월 20일 코요아칸에서 메르카데르가 트로츠키를 공격한 동안 에이팅곤과 카리다드 메르카데르는 각각 다른 차에서 대기했고, 메르카데르가 붙잡리자 달아났다.

벨라루스 슈클로프 출신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 포그롬을 겪었고 1917년 사회혁명당에 가담했다가 내전 중 볼셰비키로 전향해 고멜 체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OGPU 외국부 요원으로 중국·터키·서유럽에서 암약했고, 에스파냐 내전기 오를로프의 부관으로 공화국 금 보유분을 소련으로 반출했다. 1940년 수도플라토프와 함께 트로츠키 암살 작전을 설계했으며, 독소전쟁 중에는 제4국 부책임자로서 적 후방의 전략적 기만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종전 후 원자력 첩보 부서를 총괄했으나 1951년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되어 12년간 복역했고, 1964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1981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했으며 1992년 사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오리» 작전: 트로츠키 암살 (1938-1941)

에이팅곤의 경력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공작은 망명지 멕시코에서 레프 트로츠키를 제거한 «오리(Утка)» 작전이었다. 수도플라토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불가피한 전쟁이 발발하기 전 1년 안에 트로츠키를 제거하라고 직접 명령했고, 작전의 전반적 지휘는 수도플라토프가 맡되 주역은 에이팅곤에게 맡겨졌다. 에이팅곤은 망설임 없이 이를 받아들였으며, 수도플라토프는 그를 미국과 멕시코의 특수 불법 주재부를 이끌 적임자로 판단했다. 트로츠키에게 접근하려면 에스파냐 내전 이후 멕시코에 정착한 요원들을 통하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작전 암호명 «오리»는 에이팅곤의 제안으로 정해졌으며, 여기서 '오리'는 허위정보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작전은 서로 독립된 두 갈래로 구성되었다. 멕시코 화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가 이끄는 «말» 그룹과 카리다드 메르카데르가 이끄는 «어머니» 그룹이었다. 에이팅곤은 이전에 트로츠키와 관련된 일에 관여한 적이 없는 요원들을 쓰라고 주장했다. 그는 에스파냐에서 이미 라몬 메르카데르를 선택해 1938년 여름 바르셀로나에서 파리로 보냈는데, 젊은 사업가이자 모험가라는 위장이었다. 메르카데르와 그의 어머니 카리다드는 1938년까지 소련 정보기관과의 협력에 전념하기로 했다. 첫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1940년 5월 23일 시케이로스의 그룹이 별장을 습격했으나 닫힌 문을 향해 사격했고, 침대 밑에 숨은 트로츠키는 살아남았다. 실패 후 스탈린은 반트로츠키 네트워크를 잃을 우려를 물리치고 대안 계획을 확정했으며, 에이팅곤에게 전적인 신뢰를 표하는 전문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메르카데르는 에이팅곤·카리다드와 함께 무기를 골랐다. 경비병의 눈을 피해 숨길 수 있고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칼이나 등산용 소형 얼음 도끼가 선택되었다. 그는 다섯 명의 총격조를 투입하자는 에이팅곤의 계획을 거부하고 혼자 암살을 수행하겠다고 자원했다. 1940년 8월 20일 코요아칸의 별장에서 메르카데르가 얼음 도끼로 트로츠키를 가격했고, 트로츠키는 다음 날 병원에서 사망했다. 별장 근처 차에서 기다리던 에이팅곤과 카리다드는 집안에서 경보가 울리자 달아나 먼저 쿠바로 향했다. 메르카데르는 프랭크 잭슨이라는 이름으로 체포되었고, 멕시코 당국은 6년 동안 그의 실제 신원을 알지 못했다. 애초 계획은 경비병들이 그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눈에 띄지 않게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쿠바에 머문 뒤 에이팅곤과 카리다드는 약 6개월을 지하에서 보내다가 배로 뉴욕에 도착했다. 그는 유대인 공동체의 연락망을 이용해 새 신분증과 여권을 마련하고 미국을 가로질러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러 요원 두 명과 다시 연락을 취했다. 1941년 2월 중국행 배에 올랐고, 상하이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1941년 5월 모스크바에 돌아왔다.

소련 대외정보국(SVR)은 에이팅곤을 에스파냐 NKVD 주재관 내지 부주재관이자 트로츠키 제거 작전의 '직접 지도자'로 규정하고, 작전 암호명이 «오리»였으며 1940년 8월 20일에 끝났다고 밝힌다. 다른 한편 SVR은 그가 스탈린의 명령으로 «오리» 작전이 시작된 뒤 그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투입되었다는 취지도 전한다. 에이팅곤의 경력에서 거론되는 다른 의혹들, 즉 장쭤린 암살과 프랑스에서의 쿠테포프·밀레르 장군 납치, 에스파냐 금 보유분 반출 관여 등은 러시아어 위키백과가 그에게 돌리는 주장으로,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귀속된 서술로 제시해야 한다. 1937년 9월 파리에서 일어난 밀레르 장군 납치에서의 그의 역할을 두고는 서구의 서술을 수도플라토프 본인이 거짓이라고 반박했다는 기록도 있어, 이 대목은 논쟁적인 귀속으로 남는다.

전략적 기만 작전: «수도원»과 «베레지노»

에이팅곤의 가장 빛나는 공작은 독소전쟁 중 제4국 부책임자로서 파벨 수도플라토프와 함께 지휘한 두 편의 전략적 라디오 게임이었다. 작전명 «수도원(Монастырь)»(1941–1944)은 아프게니 데먀노프(암호명 «Гейне»)를 가상의 반소 군주제 조직 «프레스톨»의 사자로 위장해 압베어에 침투시킨 작전이었다. 데먀노프는 독일군에 포섭된 후 소련으로 재침투해 모스크바에 정착했고, 이후 2년 넘게 게렌의 동부외국군(FHO) 부서를 향해 정교한 기만 정보를 발신했다.

이 라디오 게임의 최대 성과는 1942년 가을 르제프 방면으로 독일 예비병력을 유도한 것이었다. 독일군은 르제프 공세(작전명 «화성»)를 막아냈으나, 그 사이 남쪽에서 전개된 천왕성 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이 포위·궤멸되었다. 이 작전으로 수도플라토프와 에이팅곤은 국가보안기관 장교로는 유일무이하게 수보로프 훈장을 받았다.

스탈린그라드 승리 후 스탈린은 더 과감한 후속작을 직접 지시했다. 작전명 «베레지노(Березино)»(1944–1945)는 에이팅곤이 현장 지휘를 맡았고, 야코프 세레브랸스키, 빌리 피셔(훗날의 루돌프 아벨), 미하일 마클랴르스키 등 정예들이 작전조에 합류했다. 소련군은 포로로 잡은 독일군 중령 하인리히 셰르호른을 앞세워 베레지나 강변 습지에 2천 명 규모의 독일군 잔존 부대가 고립되어 있다는 환상을 창출했다. 오토 스코르체니의 특수부대가 구조 작전 «프라이쉬츠»를 개시했고, 1944년 9월부터 1945년 5월까지 독일 공군은 39회 출격하여 특수요원 22명, 무전기 13대, 255개 화물을 투하했다. 모두 에이팅곤의 부대 손에 떨어졌다. 이 기만은 독일의 항복 직전까지 유지되었고, 1945년 5월 5일 베를린 측은 "무거운 마음으로 지원을 중단한다"는 마지막 전문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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