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술탄 아비슐리 나자르바예프

Нұрсұлтан Әбішұлы Назарбаев
카자흐스탄 카자흐스탄 1940–

연방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카자흐스탄의 30년 통치자

1991년 12월 8일, 옐친 측이 벨로베즈 숲에서 전화로 합류를 권했지만 그는 비행기를 돌리지 않았다. 여드레 뒤, 그의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고, 소련의 공식 사망 선고문(알마아타 의정서)은 그의 수도에서 서명되었다.

제철소 용광로 노동자에서 출발해 카자흐스탄 총리와 당 제1서기를 거쳐 1990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된 인물로,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 신연방조약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다. 1991년 12월 벨로베즈 협정에 불참했고,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30년 가까이 집권하며 핵무기 포기와 수도 이전, 다방면 실용 외교로 신생국의 기틀을 놓았지만, 권위주의 통치와 개인숭배, 세습적 부패의 비판도 함께 남겼다. 201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실권을 쥐다 2022년 1월 소요 사태로 완전히 퇴장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용광로에서 제1서기까지, 알마아타의 교훈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1940년 알마아타 근교의 산골 마을 체몰간에서 목축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미르타우 제철소의 용광로 노동자로 사회에 나온 그는 노동 현장에서 당으로 옮겨 가 카라간다의 산업 당료로 성장했고, 1984년 마흔넷에 카자흐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총리)이 되었다. 연방 전체에서 가장 젊은 공화국 총리였다.

1986년 12월, 고르바초프가 카자흐인 원로 쿠나예프를 러시아인 콜빈으로 교체하자 알마아타에서 청년들의 항의 시위가 터졌고 유혈 진압으로 끝났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최초의 대규모 민족 소요였던 이 사건은 중앙에 뼈아픈 교훈을 남겼고, 1989년 여름 모스크바는 결국 현지인인 나자르바예프를 제1서기로 앉혔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신우젠의 민족 충돌을 현장에서 수습하고,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장 반대 운동과 교섭하며 공화국의 불만을 관리했다. 노동자 출신의 이 실무형 지도자는 곧 연방 정치의 중앙 무대에서 가장 무게 있는 비슬라브계 목소리가 되었다.

1991년, 연방의 마지막 옹호자

공화국들이 앞다투어 이탈하던 1991년, 나자르바예프는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었다. 러시아와 국경 수천 킬로미터를 맞대고 러시아계 주민이 인구의 절반 가까이 되는 카자흐스탄에게 연방의 무질서한 해체는 재앙이 될 것이었다. 그는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 신연방조약의 가장 적극적인 설계자가 되었고, 7월 29일 고르바초프·옐친과의 심야 회동에도 함께했다. 조약이 서명되면 그가 새 연방의 총리를 맡는 구상까지 오갔다.

8월 쿠데타는 그 모든 것을 태워 버렸다. 그는 쿠데타를 규탄했고, 8월 29일에는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장을 폐쇄하는 포고령에 서명했다. 40년간 카자흐 초원을 오염시킨 실험장을 카자흐인의 손으로 닫은 것이다. 12월 벨로베즈 협정에서 슬라브 3국이 자기들끼리 연방의 소멸을 선언하자 그는 불참으로 항의했지만, 대세는 정해져 있었다. 12월 16일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했고, 닷새 뒤 알마아타 의정서로 소련의 종언이 공식화되었다.

소련은 그의 수도에서 사망 선고를 받았다. 끝까지 연방을 지키려 한 사람의 도시에서, 역사는 그런 방식의 마무리를 골랐다.

엘바스의 30년, 국가 건설과 그 그림자

독립 카자흐스탄의 첫 대통령으로서 나자르바예프는 세계 4위 규모의 핵무기를 물려받았고, 이를 전부 포기하는 결단으로 신생국의 국제적 신뢰를 샀다. 1997년에는 수도를 알마티에서 북부의 아스타나로 옮겨 러시아계가 다수인 북부를 국가에 묶었고, 러시아·중국·서방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다방면 외교로 석유 대국의 기반을 놓았다. 민족 분규 없이 다민족 국가를 유지한 것은 그의 통치가 내세우는 최대의 성과다.

그 대가는 민주주의였다. 선거는 형식이 되었고 반대파는 주변화되었으며, 2010년 의회는 그에게 「엘바스(민족의 지도자)」라는 종신 칭호를 바쳤다. 2019년 그는 대통령직을 후계자 토카예프에게 넘기면서도 안전보장회의 의장과 집권당 대표로 실권을 쥐었고, 새 수도는 그의 이름을 따 누르술탄으로 개명되었다.

2022년 1월, 연료값 인상에서 시작된 소요가 전국적 항쟁으로 번지며 「샬 케트(노인은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거리를 채웠다. 진압 후 토카예프는 그의 남은 직위와 칭호를 걷어 냈고 수도의 이름도 아스타나로 돌아갔다. 국가를 세운 아버지이자 국가를 사유화한 통치자. 소련의 마지막 세대가 세운 권력 가운데 가장 오래간 이 체제의 평가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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