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나들며 이스크라 조직망을 구축한 '그라치', 혁명의 첫 순교자
망명지에서도 기타를 치고 즉석에서 풍자시를 짓고 캐리커처를 그리던 청년 — 역사가 블라들렌 로기노프가 전하는 바우만의 초상이다.
볼가 독일계 수의사 출신 볼셰비키로, 레닌의 《이스크라》 러시아 국내 불법 배포망을 책임졌다. 1905년 10월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10만 장례 행렬은 혁명 시위로 전환되었다.
경력 연표
- 1895카잔 수의과대학 졸업, 사라토프 현에서 근무
- 1896–97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 투쟁동맹」 활동
- 1897–99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22개월 독방, 뱟카 유형
- 1900스위스에서 레닌과 이스크라 창간 준비, 러시아 국내 불법 수송 책임
- 1901–03모스크바 위원회, 키예프 체포·탈옥(「11인 탈주」), 제2차 당대회 대의원 — 볼셰비키
- 1903–04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 및 중앙위 북부국 지도, 체포 후 타간카 감옥 16개월
- 1905.10석방 직후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관련 역사 사건
바우만 사건
바우만 사건은 1903년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의 전조가 된 윤리 논쟁이었다. 1899년 뱟카 유형지에서 바우만은 동료 혁명가 클라브디야 프리호디코바와 관계를 맺었다. 두 사람이 헤어진 후 프리호디코바는 바실리 미트로프와 결혼했으나, 임신 사실이 알려지자 바우만은 그녀를 임신한 성모 마리아로 그리고 "아이가 누구를 닮았는지"라는 조롱 섞인 물음표를 붙인 캐리커처를 유포했다. 프리호디코바는 1901년 12월 독약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5쪽에 달하는 유서에서 당이 혁명가들의 사적 도덕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남편 미트로프는 이스크라 편집위원회에 바우만에 대한 당 재판을 요구했다. 마르토프, 자술리치, 포트레소프는 바우만의 행위를 규탄하고 조사를 주장했으나, 레닌은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라며 거부했고 플레하노프도 이에 동조했다. 레닌은 "우리는 소수였지만 끈질기게 버텨 결국 우리 뜻을 관철했다"고 기록했다. 이스크라 편집부는 결국 사건을 기각했고, 이 충돌은 당의 윤리적 기준을 둘러싼 첫 균열로서 이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을 예고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