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그라드 사령관 교체를 스탈린에게 직통으로 건의해 전세를 바꾼 방첩 간부
스탈린에게 직통 전보를 보낸 후 모스크바로 소환된 그는 부하에게 "내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처형 가능성에 대비했다.
스탈린 시대 군 방첩과 국가보안 기관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전선 특별부서장으로서 사령관 고르도프의 무능함을 직통 전보로 스탈린에게 보고해 교체를 이끌어냈다. 1943년부터 스메르시 부국장으로서 독일 후방 침투 공작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폴란드 공안부의 소련 측 수석고문으로서 공산주의 보안 기구 건설을 주도했다. 1946년 MGB 국가보안차관 겸 제3총국장에 올랐으나, 1951년 'MGB 내 시온주의 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투옥되었다가 스탈린 사후 석방되었다. 1953년 '직위 신뢰 상실'로 해임된 뒤 1997년 96세로 사망할 때까지 연금 생활을 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8–1941 보안·정보·치안 · 소련 · 국가보안 기관
경력 연표
- 1938–1941NKVD 특별부서 각 분과 차장·분과장을 역임하며 보안 간부로 성장
- 1941–1943남서전선·스탈린그라드·돈·남부전선 NKVD 특별부서장
- 1943–1946스메르시 방첩총국 부국장, 독일 후방 침투 및 사보타주 공작 지휘
- 1945–1946폴란드 공안부 소련 측 수석고문, 공산주의 보안기구 건설 주도
- 1946–1951MGB 국가보안차관 겸 제3총국장
- 1951–1953'시온주의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투옥, 스탈린 사후 석방
- 1953'직위 신뢰 상실'로 해임, 이후 연금 생활
관련 역사 사건
적 후방 요원전과 스탈린그라드의 특별부서
생애 초반의 셀리바놉스키는 1922년부터 국가보안 기관에서 일했고, 중앙아시아에서 바스마치와 싸운 뒤 1930년 고등국경학교를 마치고 군사방첩 중앙기구로 들어갔다. 1937년에는 파리와 프라하에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했으며, 1941년 7월 남서방향군 특별부서장을 거쳐 1942년부터 스탈린그라드·남동·돈·남부 전선의 특별부서를 지휘했다.
스메르시가 창설된 1943년 4월 그는 국방인민위원부 방첩총국 부국장이 되어 1946년까지 재직했고, 적 후방에 요원과 파괴공작조를 투입하는 부서를 맡았다. 러시아 언론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43년 10월 1일부터 1944년 5월 1일까지 적 후방에 345명의 요원이 파견되었고, 그중 50명은 역포섭된 독일 정보원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102명이 돌아왔고, 57명이 적 정보기관에 침투했으며 그중 31명이 귀환하고 26명은 잔류해 임무를 계속했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서부 벨라루스·우크라이나와 발트 지역, 폴란드에서 지하 조직을 해체하는 데 적용되었다.
그의 스탈린그라드 활동은 정보 보고와 억압이 겹쳐 있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42년 7월 22일 바실리 고르도프가 스탈린그라드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그는 모스크바에 스탈린 앞으로 암호 전문을 보내 이 임명이 잘못이라고 밝혔고, 7월 26일 급히 모스크바로 불려가 보고했다. 그는 훗날 "크게 위험을 무릅썼고 일이 잘못되었으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 회고했다. 9월 15일 밤 스탈린그라드에 직접 들어가 확인한 뒤 16일 스탈린·베리야·몰로토프에게 도시 방어가 준비되지 않았고 탄약이 바닥났다고 보고했다.
같은 보고는 특별부서의 진압 활동도 드러낸다. 62군 특별부서의 차단부대가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이탈 군인 1218명을 붙잡아 21명을 탈영자로 총살하고 10명을 체포했으며 나머지는 부대로 돌려보냈다고 적혀 있다. 이 수치는 스메르시와 특별부서가 방첩 임무와 함께 공포 정치의 도구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