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 함대를 이끌고 10월 혁명의 승부를 결정지은 첫 해군 인민위원
1917년 11월 1일, 가치나 궁전. 수천 명의 수병을 이끌고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부대를 포위한 디벤코는 코사크 대표단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장군을 넘기시오. 소비에트 권력이 보장하는 안전한 귀가를 약속하겠소." 이튿날 아침 크라스노프 장군이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여장을 하고 도주했다. 혁명의 운명을 결정한 일주일이었다.
체르니고프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발트 함대 수병으로 복무하며 볼셰비키 지하조직에 가담했다. 1917년 4월 첸트로발트 의장이 되어 함대를 장악했고, 10월 혁명 당시 헬싱포르스와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부대를 페트로그라드로 투입해 봉기를 성공시켰으며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와 제헌의회 해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크림 반도 점령과 차리친 해방에 공을 세웠고, 크론슈타트·탐보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의 결혼으로 혁명기의 가장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경력 연표
- 1912발트 함대 징병, 전함 임페라토르 파벨 1세에서 전기병 복무; 함내 볼셰비키 지하조직 가입
- 1917.04–1918.03첸트로발트 의장; 10월 봉기에 수병 부대 투입,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제헌의회 해산
- 1917.10–1918.03초대 해군인민위원; 나르바 패배로 사임·당 제명, 군사재판에서 무죄
- 1919.02–1919.09제1자드네프롭스크 사단장; 크림반도 점령, 크림 소비에트군 사령관
- 1919.10–1920.05제37소총병사단장; 차리친 해방, 북캅카스에서 데니킨군 격파
- 1921.03–1921.04혼성사단장으로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크론슈타트 요새 사령관; 탐보프 봉기 진압 참여
- 1928–1937중앙아시아·프리볼시스키·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5년 2급 군사령관
관련 역사 사건
대숙청과 최후
1937년 디벤코는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서 관내 지휘관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직접 주도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가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사건 특별재판부의 판사로 참여해 옛 동료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군사회의에서 디벤코는 스탈린 앞에서 "그들은 우리가 무식하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정치국에 선언합니다. 우리가 군사 문제에서 그들보다 더 유식합니다"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숙청의 물결은 곧 그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1938년 1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은 디벤코를 '도덕적·생활적 타락과 음주'로 공개 비난했고, 그는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굴라그 목재 조달을 감독하는 산림공업 부인민위원이라는 굴욕적인 자리로 밀려났다. 1938년 2월 26일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체포되었고, 군사-파시스트 음모 및 미국 첩보 혐의로 기소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고 모든 혐의를 자백했으며 스탈린에게 참회 편지를 썼다. 1938년 7월 29일 소련 대법원 군사합의부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당일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시신은 모스크바 외곽 콤무나르카 사격장에 매장되었다. 1956년 흐루쇼프 해빙기 사후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