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1월, 미프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4차 전원회의에 코민테른 대표로 직접 참석해 왕밍과 그의 그룹을 정치국으로 진입시키며 '28인의 볼셰비키'의 약진을 현장에서 주도했다.
10대 후반에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에 참전한 뒤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중국 노동자 공산대학)의 부총장을 거쳐 1927년 26세의 나이로 총장에 올랐고, 왕밍을 비롯한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리는 중국 유학생 집단을 직접 길러내 초기 중국공산당 내 친소련·정통파 세력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8년부터 1935년까지 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으로서 중국 혁명 노선을 조정했으며, 1935년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을 지냈다. 중국 혁명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긴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중국학의 개척자였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8–1935 외교·국제활동 · 코민테른 · 코민테른
경력 연표
- 1917–1920내전 참전, 정치위원
- 1925–1927중산대학 부총장
- 1927–1929중국 노동자 공산대학 총장
- 1928–1935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
- 1930–1931코민테른 극동부 비서
- 1935–1937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
- 1937국제민족식민지문제연구소 소장
관련 역사 사건
1930~1931년 상하이 파견과 중국공산당 지도부 개편
1928년 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이 된 미프는 1930년 12월 코민테른 대표로 다시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리리싼의 모험주의 노선을 둘러싸고 분열해 있었고, 코민테른은 9월 3중전회가 그 노선을 충분히 바로잡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미프는 도착하자 왕밍을 따로 불러 보고를 받았고, 그 압력 아래 중앙위원회는 6기 4중전회 소집에 동의했다.
1931년 1월 7일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열린 6기 4중전회는 샹중파가 주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프가 주도했다. 그는 회의에 앞서 《4중전회 결의안》 초안을 직접 기초하고 코민테른 극동국과 중앙정치국 명의로 개편된 정치국원·후보위원·중앙위원 명단을 작성했으며 참석 대표 명단까지 정했다. 왕밍은 이 자리에서 리리싼과 취추바이를 비판하는 장문 발언을 했고, 미프는 왕밍이 국제 노선에 충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 중앙위원도 아니었던 왕밍이 정치국원으로 뛰어올랐고 리리싼과 취추바이는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명목상 총서기는 여전히 샹중파였으나 실권은 왕밍에게 넘어갔다.
미프는 전원회의가 끝난 뒤 왕밍의 정치국 진입에 반대한 20~30명을 소집해 그의 지도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다. 다만 그는 왕밍 등 신진 인물들이 정치국 전체를 지탱할 위망이 없다는 점을 알고 저우언라이 등 일부 기존 정치국원은 유임시켰다. 1931년 8월 미프가 소련으로 돌아간 뒤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의 임무에 관한 결의》를 통해 4중전회와 왕밍의 집권을 전면 지지했고, 이로부터 왕밍 노선이 4년간 당을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