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의 폐허를 쓴 엔지니어
1932년 10월, 고리키의 말라야 니키츠카야 집에서 스탈린은 소련 작가들을 향해 "인간 영혼의 엔지니어"라는 말을 남기고, 1년 전 자기 손에 파멸한 작가를 그 자리에서 찾았다.
기술자이자 토지개량 전문가였던 그는 소설가로 돌아서 소련 문학에 뚜렷한 목소리를 남긴 작가였다. 본명은 클리멘토프이며, 아버지의 이름 플라톤에서 따온 '플라토노프'는 필명이었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쓴 『체벤구르』와 『구덩이』는 집단화와 스탈린 정책을 회의적으로 그려 수십 년간 출판되지 못했다. 1951년 1월 5일 모스크바에서 결핵으로 사망했고, 마지막 출판물은 러시아 민담을 다시 쓴 이야기 모음집이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문학·예술
- 1920–1921 사회운동·조직 · 소련공산당·볼셰비키
경력 연표
- 1919–1926기술자·기자·시인으로 활동
- 1927–1929『체벤구르』와 『구덩이』 집필
- 1930년대검열과 출판 배제
- 1942–1945전쟁 특파원 활동
관련 역사 사건
1931년, 「브프로크」 여백에 남은 스탈린의 글씨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보로네시의 철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혁명을 자기 세대의 사업으로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1921년 볼가 대기근을 목격한 그는 사람들이 굶주리는 동안 문학에만 종사할 수는 없다며 펜을 내려놓고 토지개량 기사가 되었고, 이후 몇 해 동안 보로네시 일대에서 우물과 저수지를 파고 농촌에 소형 발전소를 세웠다. 전기화와 관개는 그에게 단순한 기술 업무가 아니라 혁명의 물질적 실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체험이 그를 다른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작가로 만들었다. 1928년 완성한 장편 『체벤구르』와 1930년의 『코틀로반(구덩이)』은 유토피아를 향한 갈망과 그 건설의 고통을 같은 언어 안에 담았고, 두 작품 모두 그의 생전에 소련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1931년, 집단화 시기의 농촌을 다룬 중편 「브프로크(장래를 위하여)」가 잡지 『크라스나야 노비』에 실리면서 파국이 왔다. 스탈린은 잡지의 여백에 격한 메모를 남기며 작품을 쿨라크적 연대기로 규정했고, 「재능 있는 작가이지만 비열한 자」라고 평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문단의 비판 캠페인이 뒤따랐고, 플라토노프는 스탈린과 고리키에게 자신의 의도를 해명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풍자가가 아니라 건설의 어려움을 안에서부터 그리려 한 사람이었으나, 그 문장은 공식 문법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이후 플라토노프는 문단의 주변부로 밀려나 기술 특허 작업과 산발적인 발표로 생계를 이었다. 플라토노프 사건은 사회주의 건설의 언어를 누구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인 작가가 바로 그 진지함 때문에 국가의 문학 지도와 충돌한 역설을 보여준다.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의 문서고 연구는 그의 원고와 검열 기록을 복원했고, 『체벤구르』와 『코틀로반』은 오늘날 20세기 러시아 산문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1934~1937년, 중앙아시아 여행과 『문학비평』의 시절
1934년, 막심 고리키의 후원에 힘입어 플라토노프는 소비에트 투르크메니스탄 성립 10주년을 맞아 중앙아시아로 떠난 작가 집단에 합류했다. 러시아어 자료는 이를 신뢰의 표시였다고 전한다. 이 여행에서 그는 단편 「타키르(소금 평원)」를 비롯한 작품을 얻었다. 1935년 다시 투르크메니스탄을 찾은 두 번째 여행은 중편 『잔(영혼)』의 바탕이 되었다. 모스크바를 떠나 잃어버린 유목 민족 '잔'을 돕는 중앙아시아 출신 경제학자 나자르 차가타예프가 그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1935년에 완성되었으나 1930년대 소련 검열은 일부 장만 허용했고, 삭제되지 않은 전문은 1999년에 이르러서야 출판되었다. 1934년을 기점으로 그는 다시 산발적으로 발표를 이어 갔다. 1936년에 「프로」, 「불멸」, 「지구 정원의 흙집」, 「셋째 아들」, 「세묜」 등이 나왔고 1937년에는 중편 「포투단 강」이 발표되었다. 이 시기 그는 철학자 루카치 죄르지, 비평가 미하일 리프시츠와 함께 일했다. 모스크바의 잡지 『문학비평(Literaturny Kritik)』을 둘러싼 공동 작업의 시기였고, 플라토노프는 루카치·리프시츠 그룹과 연결되어 소외와 자유를 주제로 한 이들의 철학 논의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회복만의 시기가 아니었다. 1936년 8월 『문학비평』이 「불멸」을 실으면서 작품을 게재하는 데 겪은 어려움을 함께 적었고, 이듬해 『크라스나야 노브』의 비판으로 그의 평판은 손상되었다. 그래도 1937년부터 1951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소설과 평론을 포함해 여덟 권의 책을 더 출판했다. 회복의 시기이자 논란의 시기였고, 1930년대의 검열은 그가 쓴 것의 일부만을 독자에게 내보냈다.
1938년, 열다섯 살 아들의 체포
1938년 5월, 플라토노프의 외아들 플라톤이 열다섯 살의 나이로 체포되었다. 대공포 시기의 밀고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소년은 터무니없는 혐의로 수용소형을 선고받았다. 플라토노프는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손을 내밀었고, 미하일 숄로호프의 개입에 힘입어 1940년 가을 플라톤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얻은 결핵은 이미 깊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병상의 아들을 밤낮으로 간호하다 자신도 감염되었고, 플라톤은 1943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을 잃은 뒤에도 플라토노프는 전쟁의 한복판으로 갔다. 1942년부터 『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의 종군기자로 여러 전선을 돌았고, 병사의 죽음을 추상화하지 않는 그의 전선 산문은 병사들과 동료 기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1946년 발표한 단편 「귀환」은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의 가정을 그렸다는 이유로 비평가 예르밀로프의 공격을 받았고, 그는 다시 발표 지면을 잃었다.
말년의 플라토노프는 결핵과 궁핍 속에서 러시아 민담을 다시 쓰는 일로 생계를 이었고, 1951년 1월 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코틀로반』과 『체벤구르』가 소련에서 정식으로 출판된 것은 1980년대 후반 글라스노스트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전기 기사에서 출발해 참호와 병상을 거쳐 간 그의 문장은, 혁명의 세기가 낳은 가장 진실한 문학적 증언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아들의 체포, 수용소, 그리고 죽음
1938년 4월, 플라토노프의 외아들 플라톤(당시 15세)이 NKVD에 체포되었다. 이웃에 살던 독일인 기자에게 장난 섞인 편지를 보낸 일이 '간첩 행위'로 몰린 것이다. 반국가 선전 및 테러 혐의(58조)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솔로프키를 거쳐 노릴스크 강제노동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플라토노프는 스탈린, 예조프, 프리놉스키, 검찰총장에게 필사적인 탄원 편지를 썼다. 미하일 숄로호프의 개입 덕분에 1940년 10월 플라톤은 석방되었으나, 수용소에서 걸린 결핵은 이미 말기였다. 플라토노프는 아들을 간호하며 함께 지냈고, 1943년 1월 4일 플라톤은 아버지의 품에서 스무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플라토노프 자신도 아들을 간호하는 동안 결핵에 감염되었다. 전쟁 중 폭격으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1951년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모스크바 아르먄스코예 묘지에 나란히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