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 제자들의 혁명에 반대하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자 플레하노프는 말했다. "러시아의 역사는 아직 사회주의라는 밀빵을 구울 밀가루를 빻지 못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이식한 사람. 레닌 세대 전체가 그의 책으로 배웠다. 그러나 1917년 37년 만에 귀국한 그는 10월 봉기를 「역사의 단계를 무시한 시기상조」라 규탄했다. 제자들이 세운 정권 아래에서 결핵으로 죽었고, 장례식은 반(半)야당 시위가 되었다.
경력 연표
- 1876–80「토지와 자유」 활동가, 망명
- 1883제네바에서 「노동해방단」 창립: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시작
- 1889–1914제2인터내셔널의 러시아 대표 이론가
- 1903당 분열에서 점차 멘셰비키 쪽으로
- 191737년 만의 귀국, 10월 봉기 반대
관련 역사 사건
1883년 제네바, 노동해방그룹의 탄생
1883년 9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악셀로트, 자술리치 등 망명 동지들과 함께 「노동해방그룹」을 결성했다.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이었다. 인민주의 조직 「토지와 자유」의 지도자였던 그는 농민공동체에 기대는 전망 및 테러 전술과 결별하고, 러시아의 미래가 성장하는 노동계급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터였다.
그는 그해 『사회주의와 정치투쟁』을, 1885년 『우리의 견해차』를 써서 인민주의를 비판하고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러시아어로 번역했고, 국내로 밀반입된 그의 소책자들은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들을 길러냈다. 훗날 레닌은 그의 철학 저작을 국제 마르크스주의 문헌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라 평가하며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필독을 권했다.
1895년 봄, 스물다섯 살의 레닌이 제네바로 찾아와 플레하노프를 만났다. 사제 관계에 가까웠던 이 만남에서 훗날 『이스크라』 편집진의 동맹이 자라났다. 그러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와 그 아들 세대의 협력은 오래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1917–1918년, 혁명이 스승을 앞질러 가다
1917년 4월 플레하노프는 37년의 망명을 끝내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러시아는 더 이상 그의 러시아가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가 아직 사회주의 혁명을 감당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고 확신했고, 독일에 맞선 방위 전쟁을 지지했으며, 레닌의 4월 테제를 「잠꼬대」라 불렀다. 한때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전체의 스승이었던 그의 신문 『예딘스트보』는 이제 소수의 목소리에 불과했다.
10월 무장봉기(구력 10월 25일, 신력 11월 7일) 직후 그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시기상조의 권력을 잡았다며 봉기를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반혁명의 편에 서는 것만은 단호히 거부했다. 볼셰비키에 맞서는 정부의 수반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40년을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싸운 자신이 노동자에게 총을 겨눌 수는 없다며 물리쳤다.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그는 1918년 5월 30일 핀란드 테리요키의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비판했던 볼셰비키 정부도 그의 유산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저작은 소비에트 시대 내내 간행되었고, 레닌은 플레하노프의 철학 전체를 공부하지 않고서는 의식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