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보그다노프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Богд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38 ✕ 처형

네프 산업화의 설계자, 트러스트 체제로 글라브키즘에 맞서다

“우리는 산업 관리의 분권화, 관리 기관을 공장 가까이 가져가는 것, 동시에 전체 산업 지도의 중앙집권화라는 원칙을 토대로 해야만 올바르게 관리할 수 있다.” — 글라브키즘에 맞서 트러스트 체제를 옹호하며.

모스크바 상인 가문 출신의 볼셰비키 엔지니어이자 경제 관료로,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러시아 최고국민경제회의(VSNKh) 의장을 지내며 네프 시기 산업 조직의 골격을 설계했다. 소르모보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전차 생산을 총괄했고, 군수공업회의 의장으로서 내전기 군수 공장 간 계획적 생산 협력을 도입했다. 트러스트를 광범한 자율성을 가진 국가 기업 연합으로 육성하며 중앙집권적 '글라브키즘'에 맞섰고,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한 주요 양허위원회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암토르그 사장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며 소련-미국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네프 산업 경영의 이론과 실천: 트러스트와 경제계산

보그다노프가 최고국민경제회의(VSNKh)를 맡았을 때 산업은 전시공산주의의 극단적 중앙집권 기구가 지배하고 있었다. 모든 기업이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이행해야 했고, 생산물은 시장을 거치지 않고 국가 기관으로 넘어갔다. 그가 내세운 출발 원칙은 “산업 관리 자체의 분권화, 관리 기관을 공장과 작업장 가까이로 끌어오는 것, 동시에 전체 산업 지도의 중앙집권화”였다. 그는 이 교의의 강령으로 국영 부문의 부분적 축소(적자 기업의 비국유화와 국내 기업가·협동조합·외국 양허권자에 대한 임대), 자립 채산과 경제계산으로의 이관을 동반한 기업 관리의 분권화, 노동 의무제 폐지와 자유 고용으로의 복귀(성과급 및 집단 임금), 금융과 신용을 통한 생산의 경제적 조절을 제시했다. 그는 국가가 모든 생산을 운영할 수단이 없으므로 중소 생산의 회복이 불가결하다고 보았고, 사적 자본과의 협력, 임대, 협동조합을 환영했다. “우리는 저 수천, 수만 개 중소 공장의 기계가 돌아가게 해야 한다. 그것들은 농민에게 공급할 수 있지만 우리가 돌릴 수 없다. 이 모든 작은 것에 쓸 힘과 수단이 우리에게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큰 것을 생각해야 한다.” 보그다노프 아래에서 VSNKh 간부회는 국영 기업 임대에 관한 지침을 냈다. 1921년 말까지 3,860개 기업과 1,000개의 광산 및 이와 유사한 시설이 임대되었고, 사적 자본은 소매 매출의 약 75퍼센트, 농촌 시장의 약 80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외국 자본 유치 문제에 대해 그는 그것이 불가피하다고 논증했다. “외국 자본의 유치는 전적으로 불가피하다. 우리 산업의 여러 부문 설비가 전적으로 외국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부문들은 러시아에서 자체 수단으로 창설되고 유지된 적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시장 경영 방식에 가장 적합한 조직 형태로 트러스트를 보았다. 트러스트는 광범한 경제적 자율성을 누리며 시장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생산 요소를 최적으로 이용하는 국가 기업 연합이었다. 1921년 9월 14일 정치국은 “보그다노프 동지가 리데르와 에키바스투스 공장 및 광산으로 국가 트러스트를 즉시 구성할 것”을 지시했고, 레닌은 생산이 최대한의 재정적·경제적 독립에 기초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체로 “P. A. 보그다노프의 노력”과 그가 이끈 VSNKh 간부회 덕분에 트러스트는 생산 관리의 주된 조직 형태가 되었다. 1922년 여름까지 트러스트 수는 421개에 이르렀으며, GOMZ(3만 9,500명)나 유고스탈(3만 5,000명) 같은 거대 기업부터 왜소한 트러스트까지 포괄했다. 총국(글라브키)의 수는 크게 줄었고 VSNKh 기구의 인원도 대폭 감축되었다. 그는 경제계산을 “기업의 모든 지출이 엄격히 계산되고 회수되며, 기업 활동의 결과가 물질적 재화의 증대여야 하는 토대 위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의 입장과 라린의 입장 사이의 다툼 끝에 나온 1923년 4월 10일 트러스트에 관한 법령은 그의 견해를 상당히 반영했으나, 공장을 여전히 트러스트 내부의 생산 단위로만 취급했다. 그의 관리 업무의 또 다른 축은 1925년 저서 《소련 산업의 관리자와 전문가》와 그에 딸린 논문들이었다. 그는 경제 개혁의 성공이 전문 관리자에게 달려 있다고 보았고, 기업을 죽이는 형식주의와 과도한 후견을 끝낼 것을 요구했다. 관리자의 잦은 교체는 해롭다고 주장하며, 한 직위를 장악하는 데 최소 3년, 큰 직위에는 5년이 낫다고 보았다. 그는 노동자를 경영에 끌어들이는 일, 특히 생산회의를 중시했다. 생산회의는 과학기술의 사상과 성과가 노동 대중의 하층으로 파고들어야 할 학교라고 그는 불렀다. 관리자와 노동조합 사이의 신뢰, 그리고 형식적 회의가 아니라 회의 결정의 이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글라브키 대부분 폐지 노선은 전시공산주의 시기 리코프 아래 만들어진 관료행정 체계와의 날카로운 단절을 뜻했고, 1920년대 중반 강성한 중앙집권적 계획 체제로의 전환은 보그다노프처럼 민주적 경향을 지닌 지도자를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1921년 봄 그는 공학기술 인력의 이익을 보호할 조치들을 제안했다. 엔지니어와 기술자를 해당 노동조합의 완전한 성원으로서 노동자와 완전히 동등하게 대우하고, 엔지니어와 기술자에게 별도의 방을 주고, 부업의 필요를 없애도록 임금과 식량 공급을 개정하고, 과학기술 학회와 잡지를 장려하며, 전문가 처우에 관한 특별 법령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그의 제안을 토대로 1921년 8월 레닌이 서명한 법령이 발포되었다. 그는 체포된 지식인들을 개인적 보증으로 석방시키려 여러 차례 청원했다. 1921년 6월 금속산업의 “귀중하고 대체할 수 없는 일꾼” M. A. 알렉산드로프를 위해, 1921년 12월에는 체카에 엔지니어 게젠츠베이크 등의 인도를 요청했다. 1921년 10월에는 페오도시아 김나지움의 전 교장 A. P. 쿠친스키를 보증했다. 그의 교의는 네프 전 기간에 걸쳐 정식화되고 적용되었다. 그는 카시라와 볼호프 발전소 건설을 총괄했고, 네프의 적극적 전도자로서 트러스트 건설을 추진했다. 1925년 말 독일·프랑스·영국 산업을 3개월간 시찰하고 돌아온 뒤 1926년 모스크바에서 북카프카스로 전근했으며, 1927년에는 볼가-돈 운하 공사 자금을 확보했고 로스텔마시 공장의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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