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아나니예비치 크라시코프

Пётр Ананьевич Красиков
소련 러시아 1870–1939 ○ 병사

소련 최초의 검찰총장, 혁명적 합법성의 설계자

1922년 페트로그라드 재판에서 크라시코프는 정교회 메트로폴리탄 베니아민에게 사형을 구형하며 "혁명 앞에서 교회는 무릎 꿇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법정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1892년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단'에 가입하고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레닌·플레하노프와 함께 뷰로 위원을 지낸 볼셰비키 혁명가로, 1924년 초대 소련 검찰총장에 취임해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반종교 저널 《혁명과 교회》를 창간하고 1918·1924·1936년 소비에트 헌법 제정에 참여했으며, 1938년 대숙청 와중에 해임된 뒤 이듬해 병사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반종교 투쟁의 설계자: 제8부와 『혁명과 교회』

1918년 5월 크라시코프는 법무인민위원부 산하에 설치된 '교회와 국가 및 학교와 교회의 분리에 관한 법령' 시행 전담 제8부(비공식 명칭 '청산부')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크라시코프의 지휘 아래 제8부는 러시아 정교회를 구체제의 잔재로 규정하고 교회의 행정·재산·교육 기반을 체계적으로 해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918년 8월에는 법령 시행 세칙을 마련해 성직자의 사법권·재산권을 전면 박탈했고, 1919년 초에는 전국 단위의 성유물 공개 캠페인을 조직해 교회의 권위를 대중 앞에서 훼손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창간한 잡지 『혁명과 교회』의 편집장으로서 크라시코프는 "낡은 교회-국가 기계를 산산조각내야 한다"는 논지를 일관되게 견지했다. 그는 티혼 총대주교의 유화적 서한 공개를 거부하고, 체카가 제안한 '친소비에트 교회' 분열 공작에도 "종교적 의식의 흐림을 재생산하는 어떤 조직도 지지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라치스와 야로슬랍스키 등이 개량파 성직자를 활용한 교회 분열을 주장할 때도 크라시코프는 "교회와 생명은 현 역사적 단계에서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라며 어떠한 형태의 종교 조직 재생산도 용납하지 않는 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1922년 교회 귀중품 몰수 캠페인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크라시코프는 그 정점에 섰다. 중앙집행위원회 몰수령 초안을 작성한 '중앙 3인위원회'의 일원이자 트로츠키가 지휘한 모스크바·중앙 몰수위원회 위원으로서, 그는 페트로그라드 공개재판의 주임 검사로 법정에 섰다. 86명의 피고 앞에서 크라시코프는 "범죄 조직은 바로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그것은 정교회 자체, 그 엄격한 위계와 반혁명적 음모를 지닌 조직입니다"라고 단언했다. 재판부는 베니아민 관구주교, 세르기 대수도사제, 유리 노비츠키 교수, 이반 코프샤로프 변호사 등 10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22년 8월 12일 밤 이 중 4명이 총살되었다. 베니아민은 1992년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922년 10월 크라시코프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산하 비밀 '반종교위원회'의 위원이 되었고, 1929년에는 종교단체의 활동을 예배 공간 내부로만 제한한 전면적 금지 조항을 담은 「종교단체에 관한 법」 제정에 참여했다. 1924년 검찰총장으로 전출된 이후에도 그는 소비에트 무신론자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소련의 반종교 정책이 단순한 분리주의를 넘어 '종교적 편견의 완전한 소멸'을 향하도록 하는 데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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