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실무 지휘자, 레닌그라드 사건의 첫 희생자
1949년 8월 13일,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된 포프코프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레닌그라드 사건의 시작이었다.
블라디미르 현 출신의 소비에트 당 간부로, 목수 견습생에서 레닌그라드 시·주당 제1서기까지 오른 노동자 출신 당료였다. 1939년부터 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으로서 872일 포위전 내내 식량 공급, 방역, 에너지 수송, '생명의 길' 운영을 지휘하며 도시 방어의 핵심 실무를 맡았다. 전후 배급제 폐지와 도시 재건을 진두지휘했고 1946년 제1서기로 승진해 소련 제2도시 당 조직을 총괄했다. 1949년 1월 주최한 레닌그라드 무역박람회가 말렌코프의 공격을 받으며 '레닌그라드 사건'의 발단이 되었고, 그해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주요 활동과 소속
- 1925–1926 사회운동·조직 · 소련 · 당 서기국 · 조직인사
경력 연표
- 1925–1926블라디미르 볼로스트 콤소몰 서기
- 1926–1937목수·연구직, 레닌그라드 공과대학 졸업
- 1937–1938레닌그라드 레닌스키 구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1938–1939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제1부의장
- 1939–1946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포위전 내내 도시 방어·보급 총괄
- 1941–1944방어위원회 위원·방공군 군사평의회 위원·방역위원장
- 1946–1949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위원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관련 역사 사건
레닌그라드 사건: 1949년 면직에서 1954년 복권까지
레닌그라드 사건은 1949년 1월 10~20일 열린 전러시아 도매상품 박람회를 구실로 시작되었다. 이 박람회는 소련 상업부와 러시아연방 각료회의가 자기 결정에 따라 열도록 하고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에 실무 지원을 의무화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1월 28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알렉세이 쿠즈네초프를 중앙위 서기직에서 해임했고, 2월 15일 정치국 결정 「쿠즈네초프 동지와 후보위원 로지오노프·포프코프 동지의 반당적 행동에 대하여」로 포프코프는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어 엄중 경고 처분을 받았다. 1949년 2월 22일 레닌그라드 주·시 당 합동 전원회의에서 말렌코프가 이 결정을 보고했고, 이 자리에서 포프코프는 자신의 활동이 반당적 성격을 띠었다고 인정했다. 8월 13일 포프코프는 말렌코프의 집무실에서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950년 9월 29~30일 재판은 레닌그라드 리테이니 대로의 장교회관에서 비공개로 열렸다. 소련은 1947년 사형을 폐지했으나 1950년 1월 12일 '조국의 반역자, 간첩, 파괴자'에 대한 사형을 다시 도입했고, 이는 포프코프 등에게 소급 적용되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레닌그라데츠'들을 겨냥해 사형이 부활했다고 서술한다. 같은 해 10월 1일 새벽 2시, 판결 선고 한 시간 뒤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 쿠즈네초프, 미하일 로지오노프, 포프코프, 야코프 카푸스틴, 표트르 라주틴이 총살되었고 유해는 레닌그라드 근교 레바쇼보 공터에 비밀리에 묻혔다. 사건의 희생자는 이 여섯 명에 그치지 않았다(사망자 수 추정치는 사료에 따라 다르며,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1950년 10월 말 모스크바에서 별도 재판으로 20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전한다).
1953년 12월 내무부 지도부는 가족들에 대한 형사 책임과 시베리아 유형에 '심각한 근거가 없었다'고 보고했고, 1954년 4월 30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는 판결을 위조된 것으로 취소하며 포프코프를 사후 복권했다. 1954년 5월 3일 당 중앙위 간부회는 이 사건을 두고 아바쿠모프와 그의 공범들이 '고문과 위협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고 규정했고, 당적 복권은 1987년 9월 18일에 이루어졌다.
사건의 원인은 지금도 논쟁적이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레닌그라드 사건'을 가장 덜 연구된 후기 스탈린 시기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주요 피고의 당 문서 대부분이 비밀 등급으로 남아 있고 관련 사료가 파괴되어 연구자들이 접근할 수 없다고 전한다. 연구자들은 스탈린 말년의 권력 투쟁, 러시아 공산당 창설 구상, 레닌그라드 지도부의 재정 규율 위반 등을 원인으로 거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