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페트로비치 시미트

Пётр Петрович Шмидт
러시아 러시아 1867–1906 ✕ 처형

흑해함대에 적기를 올리고 차르에게 헌법을 요구한 혁명적 해군 장교

시미트가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 「…각하께 제헌의회의 즉각 소집을 요구하며, 더 이상 각하의 대신들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함대 사령관 P. 시미트.」

러시아 제국 해군 장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05년 혁명의 물결 속에서 세바스토폴 해군 봉기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순양함 오차코프에 적기를 올리고 스스로 흑해함대 사령관을 선언했으며, 니콜라이 2세에게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봉기는 90분 만에 진압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베레잔 섬에서 총살당했지만, 그 이름은 소비에트 전역의 거리·함선·기념비와 파스테르나크의 시를 통해 '시미트 중위'로 불멸화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장교에서 혁명가로: 시미트의 궤적과 오차코프 봉기

해군 장교 집안의 후예. 표트르 시미트는 제국 해군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바스토폴 방어에 참전한 소장(少將), 삼촌은 해군 대장으로 제독회의 의원이었다. 1886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치만으로 임관했으나 이른 경력은 파란만장했다. 189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파업 진압 참여를 거부하고 밀렵꾼과 연루된 함장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함에서 해고되었고, 같은 해 나가사키 해군병원에서 '과대망상적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기도 했다. 이후 자원함대와 상선에서 근무하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로 현역에 재소집되었다.

오차코프 봉기와 '시미트의 맹세'. 1905년 혁명이 시작되자 그는 세바스토폴에서 자신이 유일한 회원인 '장교·인민의 벗 연합'을 조직하고, 스스로를 무당파 사회주의자로 칭하며 수병과 장교를 상대로 선전했다. 그는 러시아 남부의 자치와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대통령제 공화국을 구상했고, 실패로 끝난 감옥 습격 시도에서 8명이 희생된 뒤 치러진 장례식에서 "우리가 쟁취한 인권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소위 '시미트의 맹세'를 남겼다. 1905년 11월 14일(구력) 수병들과 함께 순양함 오차코프에 올라 적기를 게양하고 스스로 흑해함대 사령관을 선언, 니콜라이 2세에게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했다. 봉기는 하루여 만에 진압되었다.

논쟁 속의 유산. 1906년 2월 군법회의에서 그는 봉기에 참여한 것은 수병들이 특권계급과 비러시아인을 학살하는 참극을 막고 봉기를 건설적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세바스토폴 사건을 "군대 내 낡고 예속적인 질서의 완전한 붕괴"라고 평가했지만, 그를 잘 아는 로스트콥스카야의 회고에 따르면 봉기 시점의 시미트는 공화주의에서 물러난 '입헌군주제주의자'였다. 그는 정신이상 진단을 거부했고, 1906년 3월 6일(구력) 베레잔 섬에서 수병 세 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이 모순적 인물상은 소비에트 시대에 '레드 제독'이라는 신화로 다듬어졌으나, 바로 그 모호함 때문에 파스테르나크의 시에서 일프·페트로프의 풍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학적 상상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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