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신임을 받은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오흐란카 비밀요원
1913년 2월 볼셰비키 무도회에서 말리놉스키가 빌려준 연미복을 입은 스탈린이 체포되자, 그는 스탈린과 대화 중이던 현장에서 '내가 구해내겠다'고 외쳤다.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제4대 두마 의원으로 활약한 폴란드 출신 노동운동가. 레닌의 깊은 신임을 얻어 당내 최고위 노동자 출신 지도자로 부상했으나, 실은 제정 오흐란카의 최고액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서 오르조니키제·스베르들로프·스탈린의 체포를 초래하고 당 분열을 심화시켰다. 1914년 강제 사임 후 1918년 귀환, 재판에서 사형을 받고 크렘린에서 총살되었다. 그의 침투가 드러나면서 볼셰비키 내부의 음모적 불신이 깊어졌고, 이는 훗날 대숙청 시기 편집증적 숙청 논리의 한 기원이 되었다.
경력 연표
- 1901–1905이즈마일롭스키 근위연대 복무
- 1906–1909상트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서기
- 1910오흐란카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 포섭됨
- 1912프라하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볼셰비키 의원·분파 지도자
- 1914.5강제 사임, 해외 도피
- 1914–1918독일군 포로수용소 수감
- 1918.11귀환, 베르호프니 트리부날 사형 판결, 총살
1918년 재판과 처형
1918년 11월, 말리놉스키는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스스로 소비에트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는 페트로그라드의 스몰니 연구소를 찾아가 자신을 체포하거나 레닌에게 데려가 달라고 요구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리고리 지노비예프가 그를 알아보고 체포를 명령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베르호프니 트리부날(최고재판소)의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검사 니콜라이 크릴렌코는 말리놉스키를 '모험가'라고 부르며 무자비한 공소를 펼쳤다. 증인으로는 옛 오흐란카 간부들(벨레츠키, 비사리오노프, 준콥스키 등)이 출석해 그의 비밀요원 활동을 상세히 증언했다. 말리놉스키 자신은 "나는 혁명 밖에서는 살 수 없다. 나는 스스로 모순되고 분열되어 있으며, 나를 총살해도 좋다"고 진술했다.
1918년 11월 5일, 법정은 사형을 선고했고, 그는 그날 밤 크렘린 정원에서 총살되었다. 빅토르 세르주는 회고록에서 말리놉스키의 최후를 두고 "혁명적 재판관들 앞에서도 자신의 이중성에 사로잡힌 채였다"고 기록했다. 이 재판은 혁명 후 소비에트 사법부가 옛 체제의 침투자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보여주는 초기 사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