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류민

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Рюмин
소련 러시아 1913–1954 ✕ 처형 · 총살형

의사들 음모 조작자, NKVD 회계사 출신 부역장

베리야가 류민에게 남긴 마지막 말: '더 이상 당신과 나는 서로 보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당신을 청산할 것이오.' 1953년 3월 28일.

NKVD 회계사에서 MGB 부역장까지 오른 인물. 아바쿠모프를 고발해 '의사들 음모'를 조작, 스탈린 말기 반유대 숙청을 주도했다. 스탈린 사후 체포·총살.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에팅게르 심문과 의사들 음모의 기원

류민이 국가보안 기관 내에서 두각을 드러낸 결정적 계기는 1950년 말 시작된 유대인 심장전문의 야코프 에팅게르 교수에 대한 심문이었다. 에팅게르는 사적으로 정권에 비판적 발언을 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안드레이 즈다노프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 등 고위 간부들을 치료한 경력이 있었다. 류민은 그에게 두 간부를 독살했다는 자백을 강요했다. 1950년 11월부터 1951년 1월까지 37차례의 심문이 이루어졌고, 당시 MGB 장관 빅토르 아바쿠모프는 의료진의 경고를 들어 심문 강도를 늦추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류민은 이를 무시하고 수면 박탈과 구타를 동반한 39차례의 추가 심문을 강행했으며, 에팅게르는 1951년 3월 2일 옥중에서 사망했다.

질책을 받고 위기를 느낀 류민은 1951년 7월 2일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아바쿠모프가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의 음모'를 은폐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이 서한은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측근 드미트리 수하노프가 대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은 류민을 특별중요사건부장으로 승진시키고 아바쿠모프를 체포했으며, 이로부터 본격적인 '의사들 음모' 조작이 시작되었다. 류민은 피의자들에게 '코사크식 구타법'이라 부르는 고무 곤봉 고문을 가했으며, 동료들에게 '피에 굶주린 난쟁이'(кровавый карлик)로 불렸다. 1953년 니콜라이 메샤체프의 감사 조사에서도 이 사건이 전적으로 류민의 주도로 조작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의사들 음모"의 조작 과정

류민의 출세는 1950년 유대인 심장전문의 야코프 예팅게르 교수의 심문에서 시작되었다. 예팅게르는 사망한 안드레이 즈다노프와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를 치료했던 의사였다. 류민은 1950년 11월부터 1951년 3월까지 무려 76차례에 걸친 심문과 수면 박탈, 구타로 노년의 예팅게르를 몰아붙였고, 결국 심문 도중 사망에 이르게 했다.

MGB 장관 빅토르 아바쿠모프는 의료진의 경고를 이유로 수사 완화를 지시했으나, 류민은 이를 무시했다. 질책을 받은 류민은 1951년 7월 2일 스탈린에게 아바쿠모프를 고발하는 서한을 보냈다: 장관이 유대인 의사들의 테러 음모를 은폐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서한은 말렌코프의 측근 드미트리 수하노프가 실질적으로 대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탈린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아바쿠모프는 체포되었고, 류민은 1951년 10월 특별중요사건부장과 MGB 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스탈린은 그를 "피그미"라 부르며 조롱하면서도 전권을 부여했다. 새 MGB 장관 세묜 이그나티예프는 류민의 반유대 수사를 방해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후 1년 반 동안 MGB 내 거의 모든 고위 유대인 간부들이 숙청되었고, 레프 시바르츠만보리스 로도스 같은 고문 전문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류민은 크렘린 병원 직원 리디야 티마슈크의 고발 편지를 이용해 사건을 전국적 반유대 캠페인으로 확대했다. 1953년 1월 「프라우다」에 의사들의 체포가 보도되면서 '의사들 음모'는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1953년 3월 사망한 지 불과 2주 만에 류민은 체포되었고, 라브렌티 베리야는 모든 혐의가 조작이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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