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군사정보기관의 제도적 창시자
아타튀르크는 터키 독립전쟁 시기 소련의 원조에 감사하며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아랄로프의 청동상을 세우도록 직접 지시했다 — 소련 외교관으로서 이 기념비에 오른 것은 그가 유일하다.
소비에트 군사정보의 제도적 창시자로, 1918년 10월 적군 등록국(훗날 GRU)의 초대 국장에 임명되어 볼셰비키의 해외·전략정보 능력의 기초를 닦았다.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서 트로츠키와 함께 적군을 건설하는 한편 체카 창립에도 참여했다. 내전 후에는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를 지냈고, 특히 터키 독립전쟁 시기 아타튀르크의 요청으로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소련 외교관으로는 유일하게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1937년 숙청으로 정보기관에서 축출되었으나, 60세에 제2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33군 전리품부장으로 종전까지 복무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8–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02RSDLP 입당, 러시아 제국군 입대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대위까지 진급
- 1918.1모스크바 군관구 작전과장, 체카 창립 참여
- 1918.9–1919.7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18.11–1919.6적군 등록국(GRU 전신) 초대 국장
- 1919–1920제12군·제14군·남서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7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중국 주재 전권대표
- 1927–1937최고경제회의 간부, 국가보험총국장
- 1938–1941국립문학박물관 부관장
- 1941–194560세에 자원입대, 제33군 전리품부장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하얼빈 병사 봉기 준비자1905년 하얼빈 전선에서 병사들 사이에 혁명 선전을 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 1914–19181차 세계대전러시아군 참전 장교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군 장교로 동프로이센 작전에 참전했다.
- 1917.02–072월 혁명군 위원회 위원2월 혁명 이후 연대·사단·제3군 위원회 위원으로 차례로 선출됐다.
- 1917.10–1918.0110월 혁명제2차 소비에트 대회 대표1917년 가을 제2차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대회 대표였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적군 등록국(GRU의 전신) 초대 국장1918년 11월 적군 등록국의 초대 국장에 임명되어 소비에트 군사정보 체계의 기초를 구축했으며,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적군 건설에 참여했다. 체카의 창립 구성원이기도 했다.
- 1937–1938대숙청정보 장교
참전과 군대 혁명운동, 1902~1917년
아랄로프는 1902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고 같은 해 병역 의무를 이행하려 모스크바의 제3 척탄병연대에 자원입대했다. 1년의 현역 복무를 마치고 하사관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어 1903년 11월 보병 예비역 준위가 되었다. 1905년 봄 다시 소집되어 제2 척탄병연대 소속으로 만주 하얼빈 전선에 파견된 그는 제1차 러시아 혁명기 동안 병사들 사이에서 혁명 선전을 벌이고 하얼빈의 병사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준비가 발각되자 탈영해 체포를 피해 모스크바로 비합법 귀환했고, 일부 저자에 따르면 그때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모스크바에서는 야로슬라프스키와 젬랴치카 등이 이끈 당 군사조직에 참여했고, 1905년 12월 무장봉기가 패배한 직후 자기 집에 노동자 무장대가 남긴 무기와 혁명 문헌의 은닉처를 마련했다. 제1차 혁명이 좌절된 뒤에는 한동안 혁명 활동에서 물러나 1908년부터 모스크바 상업연구소에서 공부하고 국립은행에서 회계사로 일했으며, 모스크바 사제의 딸 소피야 플레리나와 결혼해 1907년부터 소년원 교사로도 일했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다시 소집된 그는 동프로이센 작전에 참가해 포위되었다가 전투로 빠져나왔고, 이후 제114 보병연대에서 복무하며 1915년 중대를 임시 지휘했고 1916년 말에는 참모대위로 진급해 중대를 지휘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20여 차례의 전투에 참가해 훈장 다섯 개를 받았고, 일부 자료는 1917년 2월부터 남서전선 제3군 제20군단 제174 보병사단 참모부의 선임부관을 맡았다고 전한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그는 활동적인 멘셰비키로서 연대·사단·제3군 위원회 위원으로 차례로 선출되었고, 제3군 신문 《제3군의 목소리》에 그해 5월부터 12월까지 여러 글을 발표했으며 그중 〈혁명의 배신자들〉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예비의회 의원이자 제2차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대회 대표였던 그는 1917년 가을 핀란드 헬싱포르스(헬싱키)로 후퇴한 제114 보병연대 부지휘관으로 임명되어 1918년 1월 제대했다. 다만 그가 이 시기에 멘셰비키 인터내셔널리스트였는지 멘셰비키 방어주의자였는지는 사료에 따라 엇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