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의 교리문답』 저자,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허무주의 혁명가
「혁명가는 파멸된 인간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이익도, 사업도, 감정도, 애착도, 재산도, 이름조차도 없다. 그의 전 존재는 오직 하나의 목적, 하나의 사상, 하나의 열정 — 혁명에 삼켜졌다」 — 『혁명가의 교리문답』 서두
『혁명가의 교리문답』을 집필한 허무주의 혁명가. 비밀결사 '인민의 보복'을 조직했으나 동료 살해로 추방당했다. 목적을 위한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 그의 '네차예프시나'는 혁명 조직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경력 연표
- 1865–1866모스크바로 이주, 역사가 포고딘의 사무원으로 근무; 교사 시험 응시했으나 실패
- 1867–1868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 교사 자격 취득 후 교구학교 교사로 근무; 대학 청강생으로 급진 학생운동 참여
- 1869.4–8자작 체포극을 꾸민 후 스위스로 망명; 바쿠닌·오가료프와 교류, '바흐메테프 기금' 1만 프랑을 확보; 『혁명가의 교리문답』 집필
- 1869.9–11모스크바 귀환 후 비밀결사 '인민의 보복' 조직, 5인조 체계와 철저한 규율 도입; 자신에게 불복종한 학생 이바노프를 직접 살해
- 1870–1872재차 해외 도주; 제네바에서 잡지 『인민의 보복』·『공동체』 발행; 러시아 망명자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됨
- 1872–1873취리히에서 체포되어 러시아 정부에 범죄인 인도; 모스크바 배심재판에서 20년 카토르가형 선고
- 1873–1882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알렉세이옙스크 라벨린에 독방 수감; 수비병 40여 명을 포섭하고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와 비밀 연락망 구축
- 1882.12.3수종과 괴혈병 합병증으로 옥사, 35세; 시신은 니콜라옙스카야 철도 프레오브라젠스카야 역 인근에 매장(정확한 위치 미상)
이바노프 살해와 『악령』 — '네차예프시나'의 귀결
1869년 11월 21일, 네차예프는 모스크바 페트롭스카야 농업아카데미 동굴에서 동료 조직원 이반 이바노프를 직접 구타·교살·총격해 살해했다. 이바노프는 네차예프의 독단적인 선전물 배포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고 '인민의 보복'에서 이탈하려 한 학생이었다. 네차예프는 이를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고, 공포를 통한 단결을 과시하기 위해 다른 조직원들에게 살해를 지시·집행하게 했다. 시신은 얼음 구멍을 통해 호수에 유기되었으나 곧 발견되었고,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네차예프 자신은 해외로 도주했지만, 이 사건으로 러시아 혁명 망명자 사회 전체로부터 외면당했다. 바쿠닌조차 그가 동지들의 편지를 훔쳐 협박 재료로 삼은 사실을 알고 '당신은 우리보다 예수회에 더 가깝다'며 결별을 통보했다. 이 살인 사건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1872)의 핵심 모티프가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네차예프를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라는 인물로 형상화해, 혁명적 허무주의가 어떻게 인간성을 파괴하고 무고한 살인으로 귀결되는지를 그렸다. 1873년 모스크바 배심재판에서 네차예프는 '이 재판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변호를 거부했으며, 살인죄로 20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았다. 러시아 정부는 스위스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할 때는 형사범으로 규정했으나, 실제로는 그를 정치범으로 간주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가장 엄중한 독방에 수감했다.
『미래 사회 체제의 주요 기초』와 '막사 공산주의'
네차예프는 1870년 잡지 『인민의 보복』 제2호에 「미래 사회 체제의 주요 기초」를 발표하여 자신의 긍정적 사회 비전을 제시했다. 기존 질서 전복 후 '위원회'가 모든 생산수단을 공동 소유로 선포하고, 전 인민에게 의무적 육체노동을 부과하며, 노동자 조합(아르텔)을 조직해 통계표에 따라 생산을 배분한다는 구상이었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자는 공동 식당·공동 숙소·도로·통신 등 모든 사회 기반시설 이용을 금지당하며, 그에게 남은 것은 '노동 아니면 죽음'뿐이었다. 위원회는 익명의 소수로 구성되어 사회 전체를 지휘한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바쿠닌 계열을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축출하는 보고서에서 이 글을 전문 인용한 뒤 '막사 공산주의(Kasernenkommunismus)의 훌륭한 견본'이라고 조롱했다. 마르크스는 네차예프의 구상이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 아니라 소수 위원회가 위로부터 사회를 통제하는 권위주의적 강제 집산주의라고 비판했다. '막사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이후 마르크스주의 어휘에 정착하여, 관료적 강제와 위계적 통제로 운영되는 형태의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개념이 되었다. 네차예프의 이 글은 바쿠닌의 반권위주의적 아나키즘과도 충돌했다. 네차예프가 국가를 완전히 소멸시키기는どころか 중앙집권적 국가기구를 혁명 후에도 유지하고 오히려 모든 사회적 삶을 위원회의 지휘 아래 편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혁명가의 교리문답』이 제시한 '철저한 파괴'의 방법론 너머, 네차예프가 실제로 건설하고자 했던 사회의 청사진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주는 가장 명료한 텍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