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 SSR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1946년 여름 투시노 항공 퍼레이드에서 스탈린이 참석자들에게 "동지들, 이것이 주마바이 샤야흐메토프 — 카자흐스탄 최초의 민족 서기다"라고 소개하며 그를 "동방의 독수리"라 불렀다.
카자흐 당 지도부에서 올라와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다.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의 공화국 대표제 라인을 보여준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6–1954 정치·당 지도 · 소련
경력 연표
- 1930s카자흐 공화국 NKVD와 당 행정에서 성장
- 1946–1954카자흐 공산당 제1서기, 스탈린 말기 공화국 지도자
- 1950–1954민족소비에트 의장, 카자흐 대표로 공식 연방 라인에 진입
- 1954처녀지 개간과 흐루쇼프 노선 속에서 실각
- 1966중앙권력 복귀 없이 사망
관련 역사 사건
전쟁 시기 국방위원회 전권대표와 후방 기지 건설
1941년 전쟁이 시작되자 샤야흐메토프는 카자흐 SSR의 국방위원회(GKO) 전권대표로 임명되었다. 그는 서부 지역에서 철수해 온 주민과 공장의 배치를 총괄했고, 강제 이주된 민족들의 주거와 생활 문제까지 맡았다. 1941년 6월 22일 알마아타 고리키 공원에 모인 2만 5천 명 앞에서 전쟁 승리를 위한 공화국 자원 총동원을 호소했고, 청중은 박수로 화답했다. 1941년 말까지 36만 6천 명, 1943년 여름에는 53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들어왔으며, 벨로루시·우크라이나·러시아 서부에서 공장과 작업장 다수가 이전해 왔다. 아크퇴베 합금철 공장 건설이 빨라지고, 카라간다에 광산 장비 공장이, 알마아타에 루한스크발 중기계 설비가, 악몰린스크에 멜리토폴발 기계공장 작업장이 들어서 연말부터 포탄과 지뢰·수류탄을 냈다. 침켄트 납 공장은 포탄용 주철 탄체와 비스무트 생산을 맡았다. 그는 공화국의 군사학교 30곳을 직접 챙기는 한편, 전쟁으로 빠져나간 일손을 메우기 위해 전국에서 젊고 유능한 카자흐 인재를 불러들였다. 그 결과 1942년 카자흐 SSR은 러시아에 이은 제2의 석탄·공업·곡물·축산 기지가 되었고, 군 병원은 전쟁 전 2곳에서 1942년 봄 78곳으로 늘어 약 2만 4천 명을 동시에 치료했다. 1944년에는 그의 주도로 쿠르망가지 음악원, 카자흐 여성 사범대학, 체육대학, 화학기술대학 등 고등교육기관 네 곳이 창설되었다.
처녀지 개간 반대와 실각
1953년 9월 CPSU 전원회의에서 니키타 흐루쇼프는 카자흐 SSR 농업 실적을 공개 비판하며 대대적 경작 확장을 요구했다. 샤야흐메토프는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구상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는 개별 면담에서 카자흐 초원의 부식토(гумус) 층이 불과 수 센티미터에 불과해, 대규모 경작 시 표토가 풍식(風蝕)으로 날아가 오히려 비옥한 토지를 영구 상실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대신 초지를 활용한 축산 중심 전략이 카자흐스탄의 자연조건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흐루쇼프는 샤야흐메토프가 타 공화국에서의 대규모 인구 유입으로 카자흐 민족 비율이 더 떨어질 것을 우려해 경작 가능 면적을 의도적으로 축소 보고했다고 의심했다. 샤야흐메토프 팀이 제출한 대안 계획은 거부되었고, 1954년 2월 5~6일 카자흐 공산당 제9차 전원회의에서 그는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후임으로 판텔레이몬 포노마렌코, 제2서기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임명되었다. 이는 흐루쇼프가 연방 공화국 지도부를 자신의 농업 어젠다에 복속시킨 상징적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