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쇼프의 이론가에서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가 된 사람
1957년 6월 간부회. 흐루쇼프가 셰필로프의 비판을 자르며 물었다: 「자넨 얼마나 공부했나?」 셰필로프가 답했다: 「저는 김나지움에 중등학교, 적색교수학원 3년에 대학 4년입니다.」 「나는 팝 앞에서 감자 한 포대 값으로 두 겨울 배웠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십니까?!」
소련 최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경제학자 출신 당 이론가. 1941년 병역 면제임에도 민병대에 자원해 소장으로 종전한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전후 선전선동부와 프라우다 편집장을 거쳐 흐루쇼프의 핵심 이론가로 부상했고, 말렌코프 비판에서 비밀연설에 이르는 탈스탈린화의 이념적 언어를 제공했다. 1956년 외무장관으로 제3세계 외교의 물꼬를 텄지만, 이듬해 반당그룹에 가담했다가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라는 조롱 속에 몰락했다. 이후 키르기스 경제연구소와 문서보관소에서 수십 년 조용히 살았고, 사후 회고록 『불가담자』로 재평가되었다.
경력 연표
- 1926모스크바대 법학부 졸업, 야쿠츠크 검찰 업무
- 1931–1933적색교수학원, 농업경제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연구
- 1937–1941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학술서기, 경제학 교육·연구
- 1941–1946전쟁기 정치장교, 소장 계급으로 종전
- 1946–1949군 선전부와 당 선전선동부 실무
- 1949–1952중앙위 선전부장, 스탈린 말기 이념 장치 운영
- 1952–1956『프라우다』 주필,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기의 이론가
- 1955–1956중앙위 서기, 흐루쇼프 노선의 이론적 지원
- 1956–1957외무장관, 수에즈 위기와 제3세계 외교
- 1957반당그룹 가담으로 실각
- 1957–1960키르기스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로 좌천
- 1960–1982모스크바 국가문서보관소 하급직, 정치적 주변화
관련 역사 사건
1956년 6월, 카이로의 소련 외무장관
드미트리 셰필로프는 당 지도부에서 보기 드문 학자형 인물이었다. 모스크바대학 법학부를 나온 경제학자로서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찬을 이끌었고, 1941년에는 병역 면제 대상이었음에도 민병대에 자원해 전쟁을 정치장교로 마쳤으며 종전 무렵에는 소장 계급에 이르렀다. 전후에는 당 선전 부문을 거쳐 1952년부터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냈다. 스탈린이 말년의 경제 토론에서 그의 필력과 학식을 높이 샀다는 것은 본인 회고록의 중심 일화이기도 하다.
1956년 6월 그는 몰로토프의 후임으로 외무장관이 됐다. 첫 주요 행선지는 카이로였다. 그는 영국군의 수에즈 기지 철수 완료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해 나세르와 회담했고, 아스완 하이댐 건설 지원 의사를 전하며 서방의 금융 봉쇄에 갇혀 있던 이집트에 다른 선택지를 보여 주었다. 전해에 프라우다 편집장 자격으로 카이로를 방문해 길을 닦아 둔 그에게 이는 낯선 무대가 아니었다. 몰로토프 시대의 유럽 중심 외교에서 벗어나, 탈식민 세계의 신생 국가들을 소련 외교의 지평 안으로 끌어들이는 전환이 그의 짧은 임기의 표지였다.
1956년 가을 수에즈 위기가 터지자 그는 런던의 수에즈 운하 회의에 소련 대표로 참석해 이집트의 주권을 옹호했다. 헝가리 사태와 수에즈 전쟁이 겹친 그 험한 계절을 지나 1957년 2월 외무장관직은 그로미코에게 넘어갔고, 셰필로프는 중앙위 서기로 돌아왔다. 반년 남짓한 임기였지만, 제3세계를 향한 개방이라는 방향은 이후 수십 년 소련 외교의 상수가 됐다.
1957년 6월, 「그리고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
1957년 6월 18일, 당 간부회에서 몰로토프·말렌코프·카가노비치를 축으로 한 다수파가 흐루쇼프의 해임을 시도했다. 나흘간의 간부회 공방에서 셰필로프도 흐루쇼프의 독단적 작풍과 새로운 개인숭배의 조짐을 비판하며 다수파 쪽에 섰다. 그러나 주코프와 세로프의 도움으로 지방 중앙위원들이 군용기로 모스크바에 집결했고, 6월 22일부터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형세를 뒤집었다. 승리한 흐루쇼프 진영은 패자들에게 「몰로토프,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그리고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의 반당그룹」이라는 공식 명칭을 붙였다.
이 문구는 셰필로프의 이름을 역사에 고정시켰다. 핵심 3인과 달리 그는 스탈린 시대 대숙청의 책임자도 아니었고 음모의 주모자도 아니었으나, 명칭의 꼬리에 붙은 「가담한」이라는 한 단어 때문에 러시아어에는 「셰필로프는 러시아에서 가장 긴 성씨」라는 농담이 생겼다. 「그리고그들에게가담한셰필로프」가 통째로 하나의 성처럼 불렸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직위를 잃고 프룬제의 키르기스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로 보내졌고, 이후 모스크바로 돌아와 국가문서고 기관에서 일했다. 1962년에는 출당까지 당했다.
여기서도 1930년대와의 차이는 뚜렷하다. 패배한 「반당그룹」의 누구도 체포되거나 처형되지 않았다. 셰필로프는 문서고의 연구자로 조용한 세월을 보냈고, 1976년 복당됐으며, 소련 해체 뒤인 1995년 아흔 살로 사망했다. 그가 남긴 회고록은 2001년 「가담하지 않은 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평생 붙어 다닌 낙인을 뒤집은 이 제목의 책은,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시대 최고 지도부의 내부를 담은 가장 생생한 증언록 중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