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비언 협회를 이끌고 노동당 당헌 제4조를 쓴 영국의 사회주의 경제학자
1918년 산업의 공적 소유를 노동당의 목표로 못 박은 당헌 제4조의 초안을 썼다.
런던의 소시민 집안에서 태어나 사무원으로 일하며 야간에 법학을 공부한 영국의 사회주의자·경제학자. 1884년 창립 석 달 뒤 페이비언 협회에 들어가 버나드 쇼와 함께 협회를 이끌었다. 1892년 비어트리스 포터와 결혼해 평생 공동 연구를 했고, 1895년 런던 정경대학을 함께 세웠으며 1913년 주간지 《뉴 스테이츠먼》을 창간했다. 노동당 당헌 제4조를 썼고, 1922년 하원 의원, 1929년 패스필드 남작이 되어 맥도널드 2차 노동당 내각에서 식민장관을 지냈다. 1932년 부부가 소련을 다녀온 뒤 1935년 『소비에트 공산주의: 새로운 문명?』의 대부분을 썼다. 1947년 숨졌고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다른 이름: 시드니 제임스 웹 · 패스필드 남작
주요 활동과 소속
페이비언 협회에서 노동당 내각까지
런던 레스터 광장 근처에서 회계사·향수상·이발사로 불린 아버지와 이발·화장품 상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중산층 학교를 다닌 뒤 스위스와 독일에서 공부했고, 사무직으로 일하면서 버크벡 학원에서 런던 대학 법학 학위를 따고 킹스 칼리지에서도 공부해 1885년 그레이스 인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1884년 창립 석 달 뒤 버나드 쇼와 같은 무렵 페이비언 협회에 들어갔고, 비어트리스 웹, 애니 베전트, 그레이엄 월러스 등과 함께 협회를 에드워드 시대 영국에서 가장 이름난 정치·지식인 단체로 만들었다. 협회를 위해 런던의 빈곤, 8시간 노동제, 토지 국유화, 사회주의의 본질, 교육, 우생학, 상원 개혁에 관한 글을 썼다. 1892년 비어트리스 포터와 결혼했고, 그가 가져온 재산 덕분에 사무직을 그만두고 연구와 활동에 전념했다. 1894년 아내와 함께 『노동조합운동사』를 썼다. 1895년 협회에 남겨진 유산으로 런던 정경대학을 세우는 데 앞장섰고, 1912년부터 15년 동안 그곳 행정학 교수를 지냈다. 1913년 부부는 《뉴 스테이츠먼》을 창간했다. 그는 산업의 공적 소유를 노동당의 목표로 정한 당헌 제4조의 초안을 썼다. 1922년 총선에서 시엄 선거구 하원 의원이 되었고, 1929년 패스필드 남작이 되어 램지 맥도널드의 2차 노동당 내각에서 식민장관과 자치령장관을 맡았다. 식민장관으로서 1922년 처칠 백서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고친 「패스필드 백서」를 냈다. 1930년 건강이 나빠져 자치령장관에서 물러났으나 1931년 8월 노동당 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식민장관 자리를 지켰다. 1932년 5월 21일부터 7월 말까지 부부가 소련을 여행했고, 1935년 펴낸 1000쪽이 넘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새로운 문명?』은 대부분 그가 런던의 소련 대사관이 건넨 출판물과 통계를 바탕으로 썼다. 1933년에는 조카 바버라 드레이크 등과 함께 다시 소련을 찾았다. 1947년 숨져 패스필드 코너의 집 정원에 아내와 함께 묻혔고, 쇼의 청원으로 두 사람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회중석, 애틀리와 베빈 곁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