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교섭」이라는 말을 만들고 복지국가의 밑그림을 그린 영국의 사회학자·페이비언 사회주의자
1909년 구빈법 왕립위원회의 소수 보고서를 주도해, 모든 이에게 「문명 생활의 국민적 최저선」을 보장하는 복지국가의 윤곽을 처음 그렸다.
글로스터셔에서 사업가 리처드 포터의 아홉 딸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영국의 사회학자·경제학자·사회개혁가. 찰스 부스의 런던 빈민가 조사를 도우며 자선에 비판적인 시각을 길렀고, 1891년 『영국의 협동조합 운동』을 썼다. 1892년 시드니 웹과 결혼해 『노동조합운동사』와 『산업 민주주의』를 함께 쓰며 「단체교섭」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1895년 런던 정경대학을 함께 세웠고, 1905~1909년 구빈법 왕립위원회에서 복지국가의 밑그림이 된 소수 보고서를 이끌었다. 1932년 남편과 소련을 여행한 뒤 『소비에트 공산주의: 새로운 문명?』(1935)을 펴내 스탈린 체제를 무비판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1943년 숨졌다.
다른 이름: 비어트리스 포터 · 마사 비어트리스 웹
주요 활동과 소속
사회 조사에서 『소비에트 공산주의』까지
리버풀 상인의 딸 로렌시나 헤이워스와 사업가 리처드 포터의 아홉 딸 가운데 막내로 글로스터셔 스탠디시 하우스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1832년 선거법 개정에 이바지한 자유당 하원 의원이었다. 어려서부터 독학했고 협동조합 운동과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를 중요한 영향으로 꼽았다. 1882년 어머니가 죽은 뒤 아버지의 안주인 노릇을 했고, 같은 해 각료 조지프 체임벌린과 사귀었으나 여성으로서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그와 4년 만에 헤어졌다. 언니 캐서린의 일을 이어 런던 와핑의 모범 주택에서 집세를 걷는 자원봉사를 했고, 사촌 매형 찰스 부스의 런던 빈민가 조사를 도우면서 당시의 자선 관념에 비판적이 되었다. 1891년 랭커셔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의 협동조합 운동』을 써 「협동조합 연방주의」를 지지했다. 1890년 연구에 도움을 얻으려 시드니 웹을 만났고 1892년 결혼해 51년 동안 정치·학문 활동을 함께했다. 아버지가 남긴 연 1000파운드의 수입으로 평생 연구를 이어 갔다. 부부는 『노동조합운동사』(1894)와 『산업 민주주의』(1897)를 썼고, 그는 여기서 「단체교섭」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1895년 페이비언 협회는 뜻밖의 유산 1만 파운드로 런던 정경대학을 세웠다. 1905~1909년 구빈법 왕립위원회 위원으로 소수 보고서를 주도해 「모든 이에게 열린 문명 생활의 국민적 최저선」을 내건 복지국가의 윤곽을 그렸고, 훗날 『베버리지 보고서』를 쓴 윌리엄 베버리지가 이 작업의 연구원이었다. 1908년 페이비언 여성 그룹 창립 회원이 되어 동일 임금과 지방정부에서의 여성 역할을 주장했다. 협회 노선을 공격하던 H. G. 웰스는 1911년 소설에서 웹 부부를 조롱했다. 1913년 《뉴 스테이츠먼》을 창간했고, 1914년 말 노동당에 들어갔으며, 1922년 남편의 선거 운동을 맡았다. 1920년대 말에는 러시아 공산주의와 이탈리아 파시즘을 「힘의 숭배와 잔혹한 불관용의 두 얼굴」이라 했지만, 1929년 대공황과 1931년 맥도널드의 거국 내각으로 인한 노동당 분열을 겪으며 소련과 스탈린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1932년 여성 최초로 영국 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그해 남편과 두 달 동안 소련을 여행했다. 1935년 『소비에트 공산주의: 새로운 문명?』은 1차 5개년 계획기의 농업 집중화, 굴라그 수립, 1930년대의 대숙청을 무비판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을 받았고,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이를 「러시아에 관해 쓰인 가장 터무니없는 책」이라 불렀다. 1933년 조카사위 맬컴 머거리지가 소련의 기근을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 그는 일기에 그 「묘하게 히스테릭한 비난」을 적었다. 1936년 모스크바 재판이 시작될 때와 1938년 부하린이 유죄 판결을 받은 뒤에는 일기에 불안을 털어놓았으나, 마지막 책 『소비에트 러시아의 진실』(1942)에서도 중앙 계획을 찬양했다. 1943년 숨져 워킹 화장장에서 화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