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독립 활동 사회민주주의자 아일랜드 아일랜드 1856–1950 ○ 사망

페이비언 협회의 대표 논객이었던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로 192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1884년 페이비언 협회에 들어가 첫 선언문을 쓰고 『페이비언 사회주의 논집』을 엮어 점진적 사회주의의 대표 논객이 되었다.

더블린에서 태어나 1876년 런던으로 건너간 극작가·비평가. 헨리 조지와 마르크스를 읽고 사회주의자가 되어 1884년 페이비언 협회에 들어갔고, 의회와 기존 정당에 스며들어 사회주의를 이루자는 점진주의의 대변자가 되었다. 『무기와 인간』, 『피그말리온』, 『성녀 조앤』 등 60편이 넘는 희곡을 쓰고 192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차 세계대전에서 양쪽 모두를 비판했고, 말년에는 무솔리니와 스탈린을 찬양하며 독재를 지지했다. 우생학을 옹호했다. 1950년 아흔넷에 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페이비언 사회주의에서 독재 찬양까지

1882년 헨리 조지의 강연을 듣고 『진보와 빈곤』을 읽어 경제에 눈떴고, 사회민주연맹 모임에서 마르크스를 알게 되어 1883년 대부분을 『자본』을 읽으며 보냈다. 그러나 연맹 지도자 하인드먼을 독단적이라 보고 가입하지 않았다. 1884년 페이비언 협회에 들어가 그해 첫 선언문을 썼고, 1885년 집행위원이 되어 시드니 웹과 애니 베전트를 끌어들였다. 영국 경제학회 모임을 거치며 마르크스주의에서 멀어져 점진주의의 사도가 되었고, 1887년 트라팔가 광장 집회가 경찰에 유혈 진압된 「피의 일요일」 뒤에는 경찰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어리석다고 확신했다. 이후 웹의 「침투」 전략, 곧 사람과 사상을 기존 정당에 스며들게 해 사회주의를 이룬다는 노선을 받아들였다. 1889년 『페이비언 사회주의 논집』을 엮었고, 1890년 소책자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에서 사회주의는 민주적 제도로 헌법에 따라 이룰 수 있다고 썼다. 1895년 웹 부부 등과 런던 정경대학을 세웠다. 보어 전쟁 때 협회의 중립을 관철해 램지 맥도널드 등이 탈퇴했고, 노동당의 전신인 노동대표위원회 창립 회의에는 페이비언 대표로 지명되고도 가지 않았다. 1897~1903년 런던 자치구 의원을 지냈다. 1920년대 초 레닌을 「유럽에서 유일하게 흥미로운 정치가」라 불렀고, 1931년 소련을 찾아 스탈린을 「악의 없는 그루지야 신사」라 했다. 1920년대 말부터 페이비언 점진주의를 사실상 버리고 무솔리니와 스탈린을 찬양하며 독재만이 실현 가능한 정치 체제라고 믿게 되었다. 1933년에는 히틀러를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 했지만 그의 「유대인 혐오」는 비판했다. 1929년 세계 성개혁 연맹 런던 대회에도 연사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