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성』에서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라고 쓴 프랑스의 철학자·작가
1949년 『제2의 성』을 펴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의 「타자」로 규정되고 그 자리에 놓여 왔다고 분석했다.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철학자·작가. 1929년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사르트르 다음 2등으로 붙어 마르세유·루앙·파리의 고등학교에서 가르쳤으나 1943년 교직에서 해임되었다. 전후 사르트르·메를로퐁티 등과 《현대》를 창간했고, 1949년 『제2의 성』으로 여성이 남성의 「타자」로 규정되어 왔다고 분석해 현대 페미니즘의 고전을 남겼다. 1954년 『레 망다랭』으로 공쿠르상을 받았다.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적은 없지만 오래 그 동반자로 남았다가 1968년 프라하의 봄 뒤 소련 체제와 갈라섰다. 알제리 전쟁에 반대했고, 1971년 「343인 선언」을 쓰고 지젤 알리미와 「선택」 운동을 세워 임신중절 합법화에 힘썼다. 1986년 파리에서 폐렴으로 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파리에서 『제2의 성』까지
1908년 1월 9일 파리 6구 몽파르나스 대로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다섯 살부터 대학 입학 자격시험 때까지 「좋은 집안」의 딸들이 다니는 쿠르 데지르를 다녔다. 고등사범학교 강의를 청강하며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준비하다 장폴 사르트르를 만났고, 1929년 시험에 사르트르 바로 다음 2등으로 붙었다. 이후 마르세유의 몽그랑 고등학교, 루앙의 잔다르크 고등학교 등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1943년 독일 점령 아래 파리에서 첫 소설 『초대받은 여자』를 냈다. 같은 해 6월 제자 나탈리 소로킨의 어머니가 1941년 낸 미성년자 타락 교사 고소로 정직되었고, 고소는 불기소로 끝났으나 국민교육부에서 영영 해임되었다. 그 뒤 라디오 파리(비시 라디오)에서 음악 방송을 맡기도 했다. 해방 뒤 사르트르·레몽 아롱·미셸 레리스·메를로퐁티·보리스 비앙 등과 《현대》를 창간했다.
1949년 『제2의 성』은 첫 주에 2만 2천 부가 넘게 팔렸고, 큰 물의를 일으켜 바티칸 금서 목록에 올랐다. 보부아르는 이 책에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의 관점에서 「타자」로 여겨지고 규정되고 그 자리에 놓여 왔다고 분석하고,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라고 썼다. 1954년 12월 6일 『레 망다랭』으로 제51회 공쿠르상을 받았다.
공산당의 동반자에서 여성 해방 운동으로
보부아르는 프랑스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한 적이 없다. 1952년 여름 공산당에 가까웠던 클로드 란즈만과 사귀기 시작하던 무렵 사르트르와 함께 마르크스주의에 다가섰고, 그해 7월 2일 편지에 《현대》가 공산주의자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다른 이들에 맞서 그들 편에 서야 한다는 확신으로 그들에게 더 다가가고 있다고 썼다. 《현대》는 1957년 1월 헝가리 특집에서도 지도자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구현된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거듭 밝혔다. 그는 소련·중국·쿠바를 여행했고, 1955년의 중국 여행을 1957년 『대장정』으로 남겼다. 소련 체제와 제대로 갈라선 것은 수십 년의 지지 끝에 1968년 프라하의 봄 뒤였다.
알제리 전쟁 때는 고문에 강하게 반대했고, 1960년 알제리 전쟁에서 「불복종의 권리」를 선언한 「121인 선언」에 서명했으며, 1962년 지젤 알리미와 함께 고문 피해자 자밀라 부파차에 관한 책을 냈다.
1970년대에는 프랑스 여성 해방 운동에 나섰다. 1971년 4월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실린 「343인 선언」을 썼고, 지젤 알리미와 「선택」 운동을 함께 세워 임신중절 합법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77년에는 유물론적 페미니즘의 주요 지면이 된 《페미니즘 문제》의 편집 책임자를 맡았고, 1981년부터 죽을 때까지 《새 페미니즘 문제》의 편집 책임자로 일했다. 1986년 4월 14일 파리에서 폐렴으로 숨져 몽파르나스 묘지의 사르트르 곁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