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손수건으로 차르 암살을 지휘한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 러시아 첫 여성 정치범 사형수
「우리는 위대한 대의를 시작했다. 어쩌면 두 세대가 이 위에 누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해내야 한다」 — 동지들에게 남긴 말.
귀족 출신, 17세에 가문을 떠나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를 공동 창립했다. 1881년 젤랴보프 체포 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지휘, 흰 손수건으로 폭탄 신호를 보냈다. 동지 밝히지 않고 27세 교수형.
경력 연표
- 1869–1870알라르친 여성 과정 입학, 자주학습 서클 참여; 17세에 아버지와 결별하고 자택 이탈
- 1871–1873나로드니키 서클 결성, 나탄손 서클과 합류; 『자본론』 번역 참여; 차이콥스키 서클 가입, 노동자 계몽과 '민중 속으로' 운동
- 1874–1878첫 체포·6개월 수감 후 석방; 펠처 자격 취득; '193인 재판' 무죄; 민스킨 탈옥 지원 실패; 올로네츠 유형 도중 볼호보역 탈주, 지하운동 전념
- 1879.6리페츠크·보로네시 대회 참석, '토지와 자유' 분열 저지 노력;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공동 창립
- 1879.11모스크바 인근 황제 열차 폭파 기도 — '선로감시원 수호루코프의 아내'로 위장
- 1880오데사 황제 암살 기도 참여; 젤랴보프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앙노동자서클 조직 (300여 명)
- 1881.3.1젤랴보프 체포(2.27) 후 작전 지휘 인수; 예카테리나 운하에서 흰 손수건 신호로 투척수들에게 폭탄 투척 지시 —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성공
- 1881.3.10–4.3넵스키 대로서 체포, 특별심판 사형 선고, 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교수형 — 러시아 최초 여성 정치범 사형
귀족의 딸에서 혁명가로 — 가문, 유년기 그리고 결별
소피야 페롭스카야는 1853년 9월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프 니콜라예비치 페롭스키는 알렉세이 라주몹스키 백작의 후손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현 지사를 지냈고(카라코조프의 알렉산드르 2세 암살 미수 이후 1866년 해임), 1890년 사망할 때까지 내무부 회의 위원으로 남았다. 어머니 바르바라 스테파노브나 베셀롭스카야는 가난했지만 유서 깊은 러시아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오빠 바실리 리보비치는 훗날 인민의 의지당에 동조했고 1927년 소피야에 관한 회고록을 출간했으며, 동생 마리야의 고손자가 러시아 연방 교육부 장관 안드레이 푸르센코다.
1856년부터 가족은 아버지가 부지사로 임명된 프스코프에서 살았다. 이 시기 어린 소냐의 놀이 친구 중에는 현지 지사의 아들 콜랴 무라비요프가 있었는데, 25년 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검찰청 부검사로서 페롭스카야에 대한 사형을 구형한 국가 공소인이 되었다. 오빠 바실리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아이들이 연못 뗏목 위에서 놀다 콜랴가 물에 빠졌을 때 소피야는 당황하지 않고 오빠들과 함께 그를 물 밖으로 끌어올렸다. 이 일화는 훗날 수많은 전기에서 씁쓸한 상징성을 지닌 장면으로 반복 인용되었다. 유년기와 소녀 시절 여름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크림 반도의 킬부룬 영지(훗날 빚 때문에 매각)에서 보냈다.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어릴 때부터 명령으로는 무언가를 시킬 수 없고 오직 애정과 설득으로만 가능할 정도로 독립심이 강했다.' 바다에서 능숙하게 수영했고, 말 타기를 좋아했으며, 산악 지형에서도 남자 안장으로 두려움 없이 달렸다.
1869년 알라르친 여성 과정에 입학해 알렉산드라와 베라 코르닐로바 자매와 가까워졌고, 이들은 함께 자주 학습 서클을 만들었다. 1870년 말, 아버지가 '의심스러운 인물들'과의 교제를 끊으라고 요구하자 17세의 소피야는 이를 거부하고 가출했다. 베라 코르닐로바의 친구 집에 머물다가 아버지가 경찰을 통해 그녀를 찾자 키예프로 떠났다. 아버지가 여권을 발급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귀가했고, 1871년 남자 김나지움 수준의 교육 과정 이수를 증명하는 자격증을 취득했다. 1870년대 초에 부모의 결혼 생활은 사실상 파탄났다. 어머니는 크림에 정착했으며, 아버지는 내무부 관리로서 페테르부르크에 남아 바실리의 회고에 따르면 '동거녀와 밤마다 유흥을 다니고 오후 1시 이후까지 잠을 잤다.' 이 가족의 붕괴와 부당한 권위에 대한 거부가 페롭스카야를 전제정치 자체에 대한 반항으로 이끈 최초의 불씨였다.
민중 속으로 — 차이콥스키 서클과 노동자 계몽
1871년, 18세의 페롭스카야는 마르크 나탄손의 서클과 합류한 소규모 나로드니키 모임을 결성했다. 같은 해 여름 폴류스트로보의 다차에서 동지들과 함께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독일어에서 러시아어로 번역했으며, 이 번역본은 러시아 최초의 러시아어판 『자본론』(1872년 출간)의 기초가 되었다. 1872년 니콜라이 차이콥스키의 확대 서클(차이콥스키 서클)에 합류한 그녀는 비보르크 변경의 외진 골목에 은신하며 도브롤류보프 전집, 체르니솁스키 논문집, 엥겔스의 『노동계급의 상태』, 플레롭스키의 『사회과학 입문』 등 진보적 서적을 출판사와 저자로부터 대량 구매해 전국에 유통하는 지하 출판·보급 활동에 투신했다.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서클의 모든 여성들과는 훌륭한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지만, 소냐 페롭스카야는 우리 모두가 사랑했다. 쿠프신스카야나 시네구프의 아내, 다른 이들과는 동지로서 인사했지만, 페롭스카야를 보면 우리 각자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번졌다 — 비록 그녀 자신은 별 관심 없이 '발 닦고 들어와요, 흙 묻히지 말고' 하고 투덜거렸지만." 크로포트킨은 또한 그녀가 도덕적 문제에서 '엄격주의자였으나 결코 설교자는 아니었다'고 평했다.
페롭스카야는 국민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구급대원 과정을 이수해 산파 기술도 익혔다. 1872년부터 '민중 속으로' 운동에 참여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비밀 아지트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쳤으며, 그 제자 중에는 훗날 '50인 재판'에서 혁명적 연설로 유명해진 직조공 표트르 알렉세예프가 있었다. 1874년 1월 첫 체포 이후 제3부(황제 직속 정치비밀경찰) 감옥에서 6개월 이상 수감되었으나, 그녀와 단절했던 아버지 레프 페롭스키가 헌병대장 슈발로프 백작과의 인맥을 동원해 석방을 성사시켰다.
1877~1878년 '193인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후 동지 이폴리트 미슈킨의 무장 탈옥 시도에 가담했다가 실패했다. 1878년 여름 크림에서 다시 체포되어 올로네츠 현으로 유형길에 올랐으나, 볼호보 역에서 호송 헌병들이 잠든 틈을 타 탈주해 지하운동에 완전히 뛰어들었다. 이 시기까지 페롭스카야는 지하 출판, 노동자 계몽, 탈옥 작전, 유형 탈주를 모두 경험한 검증된 전문혁명가로서, 1879년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공동 창립을 위한 실전적 토대를 쌓았다.
인민의 의지당의 강령과 페롭스카야의 당 건설
1879년 리페츠크와 보로네시 대회에서 '토지와 자유'가 분열한 후, 페롭스카야는 안드레이 젤랴보프, 니콜라이 모로조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프, 베라 피그네르 등과 함께 인민의 의지당(Народная воля) 집행위원회를 공동 창립했다. 이 조직은 러시아 제국 사상 최초로 헬싱키(헬싱포르스)에서 이르쿠츠크와 트빌리시(티플리스)까지 41개 도시에 50개의 군사 서클을 연결하고, 당 예산과 통제 기관, 500명 이상의 등록된 당원과 수만 명의 동조자를 가진 구조화된 지하 정당이었다. 페롭스카야는 집행위원회와 산하 운영위원회(распорядительная комиссия)의 일원으로서 러시아 최초의 당 인쇄 매체인 『노동자 신문』(Рабочая газета) 창간에도 적극 참여했다.
게르첸과 라브로프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페롭스카야가 참여하여 작성한 당 강령은 다음과 같은 체계적인 민주주의 요구를 담았다: 전제군주제 타도, 공화제로의 이행, 제헌의회 소집, 보통선거권, 하위 직위부터 최상위까지 모든 공직의 선출제, 토지의 민중 이양,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모든 계층에 개방된 교육. 역사가 니콜라이 트로이츠키는 이 강령이 '적색' 테러의 이중적 기능(정부의 혼란화와 민중의 선동)을 규정했다고 분석한다. 즉, 테러는 민중 혁명의 전주곡이자 촉매제로 간주되었다. 인민의 의지당이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제시한 다수의 정치 원칙들은 훗날 10월 혁명 이후 소련 헌법과 러시아 연방 헌법에 반영되었다.
페롭스카야는 당내에서 특히 조직가로서 탁월했다. 1880년 젤랴보프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앙노동자서클을 조직해 30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계몽했으며,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작전에서는 젤랴보프 체포 후 지휘를 인수하여 12명으로 구성된 전투 조직을 재배치하고 '이중 폭발' 전술을 처음으로 성공시켰다. 베라 피그네르는 회고록에서 페롭스카야의 냉철함과 비할 데 없는 신중함, 조직가적 자질이 없었다면 그날 차르 암살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1881년 3월 1일 — 차르 암살 작전의 지휘와 최후
1881년 2월 27일 젤랴보프가 체포된 후 페롭스카야는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작전의 지휘를 인수했다. 그녀는 예카테리나 운하 주변에 4명의 투척수를 배치하고 황제 이동 경로를 추적했다. 3월 1일 오후, 차르의 마차가 평소와 다른 경로로 접근하자 즉시 투척수 위치를 재배치했다. 운하 제방으로 방향을 튼 마차를 확인한 페롭스카야는 흰 손수건을 휘둘러 니콜라이 리사코프에게 첫 폭탄 투척 신호를 보냈다. 차르가 부상자 확인을 위해 마차에서 내리자 두 번째 신호로 이그나티 그리네비츠키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다. 이 '이중 폭발' 전술은 러시아 사상 처음이었다.
암살 후에도 그녀는 체포된 동지 구출을 계획하며 페테르부르크에 남았다. 3월 10일 넵스키 대로에서 체포되었고, 특별심판에서 검사는 어린 시절 친구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였다. 페롭스카야는 끝내 동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사면을 청원하지 않았다. 어머니께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오직 당신의 슬픔만이 나를 괴롭힌다"고 적었다. 1881년 4월 3일 새벽, 네 명의 동지와 함께 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처형 직전 젤랴보프와 미하일로프가 입맞춤으로 작별을 고했다. 그녀는 러시아 제국 역사상 정치범으로 처형된 최초의 여성이었다. 시신은 추종을 막기 위해 프레오브라젠스코예 묘지에 비밀리 매장되었다.
역사적 유산과 기억: 혁명의 성녀에서 문화적 상징으로
페롭스카야와 인민의 의지당 동지들의 행동은 이후 러시아 혁명 운동 전체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880년대부터 제국 전역의 지하 조직들은 페롭스카야, 젤랴보프, 키발치치의 전기를 담은 소책자를 대량으로 유포했으며, 1905년 혁명 이후에는 『옛 시절(Былое)』과 『지나간 세월(Минувшие годы)』 같은 합법 저널을 통해 1881년 3월 1일 사건의 목격자들과 참가자들의 회고가 체계적으로 출간되기 시작했다. 10월 혁명 후에는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베라 피그네르, 미하일 프롤렌코, 안나 프리빌료바-코르바, 안나 야키모바 등 인민의 의지당 원로들의 회고록이 소련에서 편찬·출판되었고, 1926년 3월 1일 사건 45주년을 맞아 생존자 전원이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927년에는 페롭스카야의 동생 바실리 리보비치가 언니의 초기 생애를 상세히 기록한 150쪽 분량의 회고록을 출간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페롭스카야 연구의 핵심 1차 자료로 간주된다.
소비에트 이데올로기는 나로드니키의 개인 테러 전술을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것으로 공식 규정했으나, 동시에 차르 암살자들의 활동은 영웅화되었고 그들의 이름은 수많은 거리, 학교, 선박에 붙여졌다. 페롭스카야의 이름을 딴 거리는 오늘날까지 보로네시, 튜멘, 이르쿠츠크, 야로슬라블, 예카테린부르크, 심페로폴, 무르만스크 등 구소련 전역에 남아 있다. 혁명 이전부터 1960년대까지 운항한 화물선 '소피야 페롭스카야'호와 무르만스크 해운에서 1970년대 취역한 목재 운반선이 그녀의 이름을 이었다. 그녀의 유년 시절을 간직한 세바스토폴 인근 류비몹카의 가족 저택은 현재 페롭스카야 가문의 집-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조각가 알렉산드르 부르가노프의 작품으로 칼루가에 그녀의 마지막 기념비가 세워졌는데, 이는 그녀와 직접적 연고가 없는 도시에서 혁명가로서의 기억과 테러리스트로서의 비판 사이에서 공공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문학과 예술에서 페롭스카야는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서사시 『보복(Возмездие)』의 서정적 초상화(1917)부터 유리 트리포노프의 소설 『인내(Нетерпение)』, 마르크 알다노프의 『원천(Истоки)』, 표트르 크라스노프의 『차르 암살자들(Цареубийцы)』까지 러시아 문학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제1원(В круге первом)』의 '축하받는 자(Юбиляр)' 장에서 그녀를 언급했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1913년 페롭스카야에게 바치는 시를 썼고 자신의 딸 이름을 그녀를 따라 소냐라 지었다. 1967년 레오 아른시탐 감독의 소비에트 영화 『소피야 페롭스카야』가 제작되었고, 알렉산드르 고로드니츠키는 처형 전날 밤 페롭스카야와 젤랴보프를 노래한 발라드 '결혼식(Свадьба)'으로 그들을 기억했다. 2018년에는 역사가 니콜라이 트로이츠키의 결정적 저작 『소피야 리보브나 페롭스카야: 삶, 인격, 운명』이 출간되어 한 세기에 걸친 연구를 집대성했다. 인민의 의지당의 마지막 생존자인 안나 야키모바와 베라 피그네르는 모두 1942년 6월, 대조국전쟁 중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