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구스타보비치 조르게

Рихард Густавович Зорге
소련 독일 1895–1944 ✕ 처형 · 도쿄

도쿄에서 전쟁의 시간표를 훔친 스파이

세계대전은 내 생애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다른 어떤 요인보다 오로지 이 전쟁 때문에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 1927년 자서전에서

독일 특파원으로 위장해 도쿄에서 활약한 소련 정보원. 바르바로사 작전을 경고하고 일본의 남방 진출을 확인, 시베리아 사단의 모스크바 투입을 이끌어냈다. 1944년 처형, 1964년 소련영웅 추서.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41년, 도쿄에서 온 전문들

바쿠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자란 리하르트 조르게는 1차대전 서부전선에서 세 차례 부상을 입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 독일 공산당을 거쳐 코민테른 정보 사업에 들어간 그는 1933년 독일 신문 특파원 신분으로 도쿄에 부임했고, 이후 8년에 걸쳐 20세기 정보사에서 가장 뛰어난 첩보망 중 하나로 꼽히는 「람자이」 조직을 구축했다. 나치당원증을 지닌 그는 주일 독일대사 오트의 개인적 신임을 얻어 대사관 내부 정보에 접근했고, 고노에 내각의 브레인이었던 오자키 호쓰미는 일본 정부 최상층의 판단을 전해 왔다.

1941년 봄부터 조르게는 독일의 대소련 공격 준비에 관한 경고를 반복해서 모스크바로 타전했다. 5월과 6월의 전문들은 공격 집결과 예상 시점을 담고 있었으나, 여러 정보 계통의 상충하는 보고 속에서 스탈린과 정보 지도부는 이를 영국의 이간책일 수 있다고 의심했고 경고는 활용되지 못했다.

그의 가장 결정적인 기여는 그해 가을에 왔다. 1941년 9월과 10월, 조르게는 일본이 시베리아의 소련을 치는 북진이 아니라 남방으로 향하기로 했다는 판단을 타전했다. 다른 정보 출처들과 함께 이 보고는 극동의 소련 사단들을 모스크바 방면으로 이전하는 결정을 뒷받침했고, 그 병력은 12월 모스크바 앞에서의 반격에 투입됐다.

1944년 11월 7일, 스가모의 교수대

1941년 10월 18일, 일본 특별고등경찰이 조르게를 체포했다. 오자키를 비롯한 조직원들이 차례로 검거됐고, 조르게는 심문에서 자신이 코민테른과 붉은 군대를 위해 일했음을 인정하되 일본에 대한 적대 행위가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한 활동이었다고 진술했다. 소련 정부는 그를 아는 바 없다고 부인했고, 억류자 교환의 기회도 성사되지 않았다.

1944년 11월 7일, 10월 혁명 27주년 기념일에 조르게는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지막 순간 그는 일본어로 붉은 군대, 국제공산당, 소비에트 공산당 만세를 외쳤다고 형무소 기록은 전한다. 같은 날 오자키 호쓰미도 처형됐다.

소련은 20년 가까이 그의 이름에 침묵했다. 1964년에 이르러서야 조르게는 소련영웅 칭호를 추서받았고, 그의 얼굴이 우표에 실렸으며, 모스크바와 여러 도시의 거리가 그의 이름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도쿄 다마 묘지에 묻혔고, 일본인 동반자 이시이 하나코가 오랫동안 무덤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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