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레프트리뷰》 초대 편집장이자 버밍엄 현대문화연구소를 이끈 자메이카 출신 영국의 문화연구자
1979년 1월, 대처가 총리가 되기 넉 달 전 《마르크시즘 투데이》에 「거대한 우경화 쇼」를 실어 대처주의를 노동계급 다수의 불만에 뿌리내린 새 시대의 우파 정치로 분석했다.
자메이카 킹스턴의 중간계급 집안에서 태어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문화이론가. 1951년 로즈 장학생으로 옥스퍼드에 왔고,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과 수에즈 위기를 계기로 박사 과정을 접고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다. 《유니버시티스 앤드 레프트 리뷰》를 거쳐 1960년 《뉴레프트리뷰》 초대 편집장이 되었다. 1964년 버밍엄 대학 현대문화연구소(CCCS)에 들어가 1968년 소장 대행, 1972~1979년 소장으로 일하며 문화연구를 인종·젠더로 넓혔다. 「텔레비전 담론의 부호화와 해독」(1973), 공저 『위기의 단속』(1978), 대처주의 분석으로 이름났고, 1979~1997년 오픈 유니버시티 사회학 교수를 지냈다.
다른 이름: 스튜어트 헨리 맥페일 홀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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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997
학술·연구대표
킹스턴에서 옥스퍼드, 첫 신좌파로
1932년 2월 3일 영국 식민지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중간계급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상에는 포르투갈인·유대인·영국인·아프리카인·인도인이 섞여 있었고, 집안 남계에는 노예제와 얽힌 대농장주도 있었다. 엘리트 학교인 자메이카 칼리지에서 영국식 고전 교육을 받으며 엘리엇·조이스·프로이트·마르크스·레닌과 카리브 문학을 읽었다. 가족 중에서도 피부색이 짙었던 그가 식민지 서인도제도의 피부색 위계 속에서 자란 경험은 뒷날의 사상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51년 로즈 장학생으로 옥스퍼드 머턴 칼리지에 와서 영문학을 공부해 서인도제도 출신 대규모 이주민인 「윈드러시 세대」의 일원이 되었다. 헨리 제임스에 관한 박사 논문을 시작했으나, 수많은 당원이 영국 공산당을 떠나게 만든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과 수에즈 위기에 자극받아 1957~1958년 무렵 학위를 접고 정치 활동에 전념했다. 1957년 핵군축운동(CND)에 가입했고, 1958~1960년 런던의 중등학교와 성인 교육 현장에서 교사로 일했다.
옥스퍼드 시절 《유니버시티스 앤드 레프트 리뷰》에서 일한 그는 E. P. 톰슨·레이먼드 윌리엄스 등과 이 잡지를 《뉴리즈너》와 합쳐 1960년 《뉴레프트리뷰》를 창간하고 초대 편집장이 되었다. 1958년에는 라파엘 새뮤얼 등과 런던 소호에 좌파의 모임 장소인 파르티잔 커피하우스를 열었다. 1961년 또는 1962년 《뉴레프트리뷰》 편집진에서 물러났다.
버밍엄 현대문화연구소: 부호화·해독과 『위기의 단속』
1964년 영국영화연구소의 패디 화넬과 함께 대중오락으로서의 영화를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초기 저작 『대중 예술』을 냈고, 이를 본 리처드 호가트가 그를 버밍엄 대학 현대문화연구소로 불렀다. 1968년 호가트를 이어 소장 대행, 1972년 소장이 되어 1979년까지 연구소를 이끌었다. 그는 문화연구의 범위를 인종과 젠더로 넓히고 푸코 등 프랑스 이론을 받아들였으며, 공동 편저 『의례를 통한 저항』(1975)으로 청년 하위문화 연구의 틀을 세웠다.
홀은 그람시 이후의 헤게모니 이론에 서서, 언어 사용이 권력·제도·정치경제의 틀 안에서 작동하고 사람들은 문화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라고 보았다. 그에게 문화는 감상하거나 연구할 대상만이 아니라 권력관계가 세워지고 또 흔들릴 수 있는 사회적 행동과 개입의 장이었다. 1973년 「텔레비전 담론의 부호화와 해독」은 방송이 만든 메시지가 「효과」를 내기 전에 먼저 의미 있는 담론으로 해독되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해, 시청자가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지배적-헤게모니적 해독, 타협적 해독, 대항적 해독으로 나누었다. 수용자는 텍스트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협상하거나 맞설 수 있다는 이 모형은 수용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공저 『위기의 단속: 노상강도, 국가, 법과 질서』(1978)는 노상강도가 미국에서 수입된 새 범죄라는 1970년대 영국의 공포를 분석했다. 홀과 동료들은 「범죄율 상승」이라는 등식이 사회 통제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며, 범죄 통계가 정치적·경제적 목적에 따라 조작되어 「위기를 단속」할 필요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는 도덕적 공황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대처주의 분석과 오픈 유니버시티
1979년 1월, 마거릿 대처가 총리가 되기 넉 달 전 홀은 영국 공산당의 이론지 《마르크시즘 투데이》에 「거대한 우경화 쇼」를 실어 「대처주의」를 분석했다. 좌파 다수가 대처를 그저 목청 높은 주부쯤으로 여기던 때, 홀은 대처주의의 뿌리를 노동계급 상당수가 국가 관료제와 노동조합의 대안 부재에 품은 실망에서 찾았다. 대처주의는 문화와 도덕처럼 비정치적이라 여겨지던 문제로 대중에게 말을 걸어 공론의 윤곽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좌파가 다문화주의·동성애자 운동·환경 운동 같은 새 사회운동과 손잡아야 한다고 권했다.
시장과 좌파의 조직적·정치적 보수성에 관한 좌파의 통념에 도전한 그의 《마르크시즘 투데이》 글들은 닐 키녹과 토니 블레어 시기의 노동당에까지 영향을 미쳤지만, 홀 자신은 뒷날 신노동당이 「대처주의가 정해 놓은 지형」 위에서 움직인다고 비판했다.
1979년 오픈 유니버시티 사회학 교수가 된 뒤 『쇄신으로 가는 험난한 길』(1988), 『근대성의 형성』(1992), 『문화 정체성의 문제들』(1996) 등을 펴내며 디아스포라와 문화 정체성 연구를 이끌었다. 1995~1997년 영국 사회학회 회장을 지냈고, 1995년 잡지 《사운딩스》를 공동 창간했으며, 국제시각예술연구소(Iniva)와 흑인 사진가 협회 오토그래프 ABP의 초대 의장을 맡았다. 1997년 은퇴했고, 2014년 2월 10일 신부전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