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의 회색 추기경
수슬로프가 출장을 가면 키릴렌코가 서기국을 대신 주재했다. 돌아오자마자 수슬로프는 자신의 부재 중 내려진 결정을 모조리 뒤집었다. —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스탈린 시대에 부상해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를 거치는 동안에도 좀처럼 권력의 전면에 나서지 않아, 경력의 여러 대목과 실제 영향력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사생활에서는 금욕적이었고, 당의 교리와 문화적 허용 범위를 엄격히 지킨 보수적 이데올로그였다.
경력 연표
- 1920s–1930s당 학교와 경제 행정에서 성장, 북캅카스·스타브로폴 당직 수행
- 1944–1946리투아니아 당국에서 전후 소비에트화와 반민족주의 통제에 관여
- 1947–1982중앙위 서기, 이념·선전·정통 노선의 장기 관리자
- 1956스탈린 비판 이후에도 당 정통성과 통제 언어를 재정리
- 1964–1982브레즈네프 체제의 보수적 이념 심판관
관련 역사 사건
- 1941–1945대조국전쟁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로 북캅카스 유격대 지도
- 1956.02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이념 부문 관리노선 전환을 이념적으로 정리하는 일을 맡았고, 뒤에 그 한계를 지키는 쪽에 섰다.
- 1956헝가리 혁명부다페스트 파견미코얀과 함께 현지에서 강경 대응을 조율했다.
- 1957반당 그룹 사건흐루쇼프 지지중앙위원회에서 흐루쇼프 편에 선 이념 담당 서기였다.
- 1956–1969중소분열논쟁의 이론 담당중국 비판에 대한 소련 측 이론적 반박을 정리하고 당 회의에 보고했다.
- 1965–1970코시긴 개혁이념적 보수당의 이념 책임자로 시장 지향 개혁에 반대했다.
- 1968프라하의 봄이념 담당당의 이념 책임자로 강경 노선을 뒷받침했다.
스타라야 광장의 회색 추기경
미하일 수슬로프는 1902년 사라토프현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21년 입당했고, 노동자예비학부(라브파크)와 플레하노프 경제대학, 붉은 교수단 경제연구소를 거치며 당이 길러 낸 첫 세대 이론 간부가 됐다. 1930년대에는 당 통제기관과 로스토프·스타브로폴의 지역 당 조직에서 일했는데, 이는 대숙청기의 지방 당 지도부라는 자리가 뜻하는 책임까지 포함하는 경력이었다. 전쟁 중에는 스타브로폴 지역 파르티잔 운동의 지도를 맡았고, 1944년부터는 리투아니아 문제를 다루는 중앙위 특별국을 이끌었다.
1947년 그는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어 죽는 날까지 35년간 그 자리를 지켰고, 프라우다 편집장과 코민포름 업무를 겸하며 스탈린 말년의 이데올로기 부문을 총괄했다. 1949년 코민포름 회의에서 「평화 옹호와 전쟁 방화자들에 대한 투쟁」 보고를 한 것도 그였다. 흐루쇼프 아래에서도, 브레즈네프 아래에서도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통의 최종 심급이자 선전·문화·교육·국제공산주의운동을 관장하는 「제2서기」로 남았다. 사람들은 그를 「회색 추기경」이라 불렀다.
권력의 정점 곁에서 산 세월에 견주면 그의 생활은 유별나게 검소했다. 유행이 지난 양복과 덧신, 규정 속도 아래로 달리게 한 관용차, 선물을 되돌려 보내는 습관은 모스크바 관가의 전설이 됐다. 그는 개인숭배도, 축재도, 파벌도 만들지 않았고, 원고 없이 말하는 일도 드물었다. 검열과 반체제 문제에서 그의 손은 단호했고, 그 단호함은 문화의 생동성에 값을 치르게 했다. 그러나 그 자신에게 그것은 사욕이 아니라 신념의 집행이었다. 혁명이 만든 제도를 지키는 일에 삶 전체를 바친, 금욕적 정통의 화신이었다.
1964년 10월 14일, 전원회의의 보고자
1964년 10월, 흑해 연안에서 휴가 중이던 흐루쇼프는 모스크바로 소환됐다. 간부회 동료들은 그의 즉흥적 통치, 농업 실패, 행정 개편의 혼란, 커져 가는 개인숭배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사임을 요구했고, 10월 14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 결정을 추인하는 공식 보고를 맡은 사람이 수슬로프였다. 그는 특유의 건조한 어조로 흐루쇼프의 과오 목록을 낭독했다. 1957년 「반당그룹」 사건 때 흐루쇼프를 지켜 냈던 바로 그 사람이, 이번에는 그의 퇴장을 집행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방식이다. 1964년 10월의 교체는 체포도 유혈도 없이, 당 규약의 절차를 밟아 이루어졌고 흐루쇼프는 연금과 다차를 받고 물러났다. 실각한 지도자가 목숨과 자유를 지킨 채 은퇴한 이 사건은, 소비에트 정치가 1930년대의 관행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보여 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수슬로프 자신은 1인자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고, 서기장직이 브레즈네프에게 가도록 힘을 실었다. 그는 평생 두 번째 자리의 권력을 선호했고, 바로 그 때문에 어떤 파벌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 중재자로서 오래 살아남았다.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수슬로프는 이데올로기와 인사의 문지기로서 체제의 항상성을 지켰다. 1982년 1월 25일 그가 사망하자 그 항상성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어 버린 이데올로기 서기 자리로 그해 5월 안드로포프가 국가보안위원회에서 옮겨 왔고, 이는 브레즈네프 사후 승계 구도를 사실상 결정지었다. 회색 추기경의 죽음은 그가 평생 봉인해 온 변화의 문이 열리는 신호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