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을 만든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고스플란 의장
1967년 오르비타가 가동되자 시베리아·극동 주민 수천만 명이 처음으로 모스크바 중앙TV를 시청했다. 탈리진은 "우리가 우주에서 신호를 보내는 첫 국가가 될 것"이라 했다.
통신 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테크노크라트로, 1967년 세계 최초의 위성 텔레비전 방송망인 오르비타 시스템의 과학적 개발을 이끌어 시베리아와 극동 주민 9천만 명에게 중앙 TV를 공급했다. 통신장관(1975~1980)을 거쳐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고스플란 의장으로 발탁되어 초기 페레스트로이카 경제 개혁의 계획을 주도했으나, 개혁 속도를 둘러싼 갈등 속에 1988년 경질되었고 1989년 보수파로 분류되어 퇴진했다.
경력 연표
- 1955통신부 산하 무선연구소(NII Radio) 기술자, 수석 설계자, 선임연구원, 부소장
- 1965소련 통신부 차관
- 1970소련 통신부 제1차관
- 1975–1980소련 통신장관
- 1980–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85–1988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
- 1988각료회의 사회발전국 국장
- 1988–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관련 역사 사건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 시스템: 오르비타
탈리진의 가장 중요한 과학기술적 유산은 1967년 가동된 세계 최초의 위성 텔레비전 방송망인 오르비타(Орбита) 시스템이다. 모스크바 통신전기기술대학(МЭИС)을 졸업한 후 1955년 통신부 산하 무선연구소(NII Radio)에 입사한 탈리진은 인제니어에서 수석 설계자, 선임연구원, 부소장까지 승진하며 오르비타 구상을 주도했다.
오르비타의 핵심 과제는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의 광대한 거리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지상 중계탑으로는 영구동토와 산악지대를 가로질러 TV 신호를 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탈리진 팀은 고타원 궤도(몰니야 궤도)를 도는 통신위성 몰니야-1에서 신호를 중계하는 방식을 택했다. 각 지상국은 직경 12미터의 파라볼릭 안테나를 통해 위성 신호를 수신해 지역 TV 센터로 전달했으며, 북극권의 혹한과 중앙아시아의 모래폭풍 속에서도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다. 1967년 10월 25일 첫 20개 지상국이 정규 방송을 시작했고, 1973년까지 40개로 확대되어 약 9천만 명의 주민이 모스크바 중앙TV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탈리진의 지휘 아래 오르비타보다 소형화된 위성 TV 시스템 '모스크바'와 국제방송용 '모스크바-글로벌'이 잇따라 구축되었다. 오르비타의 성공은 탈리진에게 두 차례의 소련 국가상(1968, 1975)을 안겼으며, 그 자신이 『소비에트 대백과사전』(БСЭ)의 '오르비타' 항목을 집필했다. 보리스 체르토크는 회고록에서 "소련의 위성통신 기술은 미래의 통신장관이 수석 엔지니어로 그 기원에 서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운이 좋았다"고 평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계획자: 고스플란 의장 시절
1985년 10월, 고르바초프는 니콜라이 바이바코프의 후임으로 탈리진을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에 임명했다. 이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첫 단계로 추진된 '가속화(우스코레니예)' 노선을 계획 체계 안에서 뒷받침할 테크노크라트를 원했기 때문이다. 탈리진은 동시에 각료회의 제1부의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에도 올랐다.
탈리진이 지휘한 제12차 5개년 계획(1986~1990년)은 기계 제조업 현대화에 2000억 루블을 투자하고 1987년 국민소득 4.1% 성장을 목표로 했다. 1986년 11월 최고회의에서 탈리진은 이 계획이 경제 효율을 높여 서방과 경쟁하겠다는 고르바초프의 구상에 부합한다고 밝혔고, 이듬해 시행된 국영기업법은 기업 자율성을 도입해 중앙계획의 틀을 재편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1986년 유가 폭락, 반알코올 캠페인으로 인한 세수 감소, 체르노빌 사고가 겹치며 예산은 전후 최초의 적자로 돌아섰다.
고스플란은 생산량 할당 기관에서 경제 전략 기관으로 전환해야 했지만, 개혁 속도에 불만을 품은 고르바초프 진영은 탈리진을 보수파로 분류했다. 1988년 2월 탈리진은 고스플란 의장에서 해임되고 유리 마슬류코프로 교체되었으며, 무명의 사회발전국으로 좌천되었다가 1989년 정계에서 완전히 퇴진했다. 그의 경질은 계획 기관 내 개혁 저항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당시 CIA 보고서는 "탈리진의 해임이 구조조정에 대한 고스플란의 저항을 줄일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