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독방에서도 굴하지 않은 히틀러의 개인적 정치수
“힌덴부르크를 찍는 자는 히틀러를 찍는 것이고, 히틀러를 찍는 자는 전쟁을 찍는 것이다.” — 대통령 선거(1932)
독일공산당(KPD) 의장. 함부르크 항만 노동자 출신으로 당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중정당으로 성장시켰다. 나치 집권 후 체포되어 11년 독방 끝에 1944년 부헨발트에서 총살되었다.
경력 연표
- 1903–1920함부르크 부두 노동자 — SPD, USPD를 거쳐 KPD로
- 1925–1933KPD 의장, 적색전선전사동맹 지도
- 1925, 1932대통령 선거 출마
- 1933게슈타포에 체포 — 11년 독방
- 1944.8히틀러의 직접 명령으로 부헨발트에서 총살
코민테른의 독일 대표 — 대중정당에서 '사회파시즘' 노선까지
1925년 KPD 의장이 된 텔만은 당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진지한 정치 세력으로 변모시켰다. 당원은 수십만 명으로 성장했고, 노동조합과 실업자 조직에 깊이 뿌리내렸다. 그가 이끈 준군사조직 적색전선전사동맹(RFB)은 거리에서 나치 돌격대(SA)와 충돌하며 공산주의의 물리적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러나 텔만의 KPD는 코민테른의 '사회파시즘' 테제를 충실히 따랐다. 이 노선은 사회민주당(SPD)을 나치즘 못지않은 주적으로 규정했고, 양당의 반파시즘 통일전선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931년 텔만은 '나치 나무 몇 그루 때문에 사회민주당이라는 숲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선언했다. 당내에서는 이 노선에 반대하는 '화해파'와 '노이만 그룹'이 등장했으나, 텔만은 소련의 지지를 받아 이들을 숙청했다.
코민테른은 1935년에야 비로소 '인민전선'으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그때는 이미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뒤였고 KPD는 파괴된 상태였다. 텔만은 1932년 대선에서 498만 표(13.2%)를 얻었으나, SPD와의 분열 속에서 히틀러의 집권을 막을 정치적 조건은 사라져 있었다. 그의 당 건설은 인상적이었지만, 그가 고수한 노선이 독일 노동운동의 분열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은 오늘날까지 독일 좌파 역사학의 핵심 쟁점으로 남아 있다.
11년 독방 — 히틀러가 직접 감시한 수인
1933년 3월 3일, 나치 집권 5주 만에 에른스트 텔만은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 한나우의 한 안전가옥에서 제보로 붙잡혔다. 이후 11년 5개월(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독일공산당 의장은 히틀러의 개인적 수인이었다.
그는 모아비트, 하노버, 바우첸 교도소를 전전하며 대부분 독방에 갇혀 있었다. 히틀러는 그의 재판을 거부했다. 공개 법정에 세우면 텔만이 기소장을 반나치 연설로 바꿀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대신 게슈타포는 주기적으로 텔만의 '변절' 협상을 시도했고, 매번 거절당했다.
독방에서도 텔만은 굴하지 않았다. 아내 로자와 딸 이르마에게 보낸 밀서들은 지하로 유통되어 독일 저항 세력의 사기가 되었다. 그는 국제 정세와 독일 노동계급의 상황을 분석하는 글을 면도날로 연필 끝을 깎아가며 써내려갔다.
1944년 8월,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하고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히틀러는 직접 명령을 내렸다: "텔만을 처형하라." 8월 18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 총살되었다. 나치 선전은 그가 연합군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전후 동독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했다. 개척자 조직은 그의 이름을 따랐고, 수많은 거리와 광장이 텔만의 이름을 가졌다. 그를 배반했다고 지목된 동지들에 대한 의혹과 비난은 통일 후에도 가라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