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묜 콘스탄티노비치 티모셴코

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Тимош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5–1970 ○ 자연사

소련 원수, 1940-1941년 국방인민위원

바실렙스키 원수의 회고에 따르면, 1940년 1월 7일 최고군사회의에서 스탈린이 누가 지휘를 맡겠는가를 묻자 긴 침묵이 흘렀고, 티모셴코가 일어나 논의된 모든 것을 받는다면 맡겠다고 답하며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895년 베사라비아 오르만에서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의 막내로 태어나 1914년 징집되었고, 내전에서 부됸니 기병군 계열로 성장했다. 1920~1930년대에 기병 군단과 군관구를 지휘했고 겨울전쟁에서 북서전선을 이끌며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했다. 1940년 5월 국방인민위원에 임명되어 대숙청으로 망가진 붉은 군대의 재무장·기계화를 추진했다. 1941년 6월 23일부터 스타브카 의장을 맡았고 이후 여러 전선을 지휘하며 11월 로스토프나도누를 되찾았다. 1942년 5월 하리코프 포위 실패와 스탈린그라드 전선 해임 뒤 1943년 3월까지 북서전선을 지휘했고, 이후 스타브카 대표를 지냈으며 1960년부터 명예직을 맡았다. 1970년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겨울전쟁과 만네르헤임 선 돌파

1939–1940년 소련-핀란드 전쟁(겨울전쟁) 초반, 붉은 군대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의 지휘 아래 만네르헤임 선에서 참패를 거듭했다. 1940년 1월 7일 스탈린이 주재한 최고군사회의에서 "누가 지휘를 맡겠는가?"라는 질문에 긴 침묵이 흐른 뒤, 티모셴코가 일어나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면 제가 맡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북서전선 사령관으로 임명된 그는 곧바로 전술을 전면 재편했다. 탱크를 전선에서 빼고 중포를 집중 배치했으며, 핀란드군을 본뜬 스키 부대와 저격수를 대폭 증강했다. 2월 초에는 25개 사단을 카렐리야 지협 서부에 집결시키고, 2월 1일 하루 동안 숨마 요새 지역에만 3,000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베르됭 전투 이후 최대 규모의 포격이었다. 집중 포격으로 만네르헤임 선에 균열이 생겼고, 2월 중순 본격 돌파가 시작되어 비푸리(비보르크)가 함락되었다. 3월 13일 소련은 자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티모셴코는 3월 21일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와 함께 원수 계급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전선과 1939년 폴란드 전역

1939년 9월 11일, 붉은 군대가 서부 우크라이나로 진입할 작전을 준비하면서 키예프 특별군관구의 야전 기구를 기반으로 우크라이나 전선이 편성되었다. 전선 사령관에는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이던 1계급 군단장 세묜 티모셴코가 임명되었고, 참모장은 니콜라이 바투틴, 군사평의회에는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서기 니키타 흐루쇼프가 참여했다. 전선 사령부는 키예프에 두었고, 예하 부대는 셰페톱카·볼로치스크·카메네츠포돌스크·오데사 집단으로 전개되었다.

소련 국방인민위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총참모장 보리스 샤포시니코프의 1939년 9월 14일자 지령(제16634호)은 부대를 9월 16일 아침까지 비밀리에 집결시켜 대립하는 폴란드군을 격파할 목적의 공격 준비를 명령했고, 9월 17일 전선 부대는 현역군 편성에 들어갔다. 작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16일 뒤인 9월 17일에 시작되었으며 소련은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지 않았다. 공식 명분은 서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벨라루스 주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였다.

이 작전의 정치적·법적 성격은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는 독소 불가침조약의 비밀 의정서를 이행한 것이었고, 소련과 나치 독일 사이의 사실상의 폴란드 분할(때로 '네 번째 분할'이라 불린다)이었다. 소련 사학은 이를 '붉은 군대의 해방 원정'이라 했고, 폴란드 사학은 '소련의 폴란드 침공'이라 부른다. 9월 28일부터 전선은 제5·6·12군과 오데사·기병 집단을 편성했고, 9월 29일 독소 우호 및 국경 조약이 조인된 뒤 부대는 도달한 선에서 정지했으며 10월 5일부터 이고르카·볼쿠샨카·피사·나레프·부그·산 강을 따르는 새 국경선으로 철수했다.

작전의 물질적 성과로 10월 5일까지 657문의 포와 박격포, 13만 1232정의 소총과 기병총, 5242정의 기관총, 11만 7450발의 포탄과 지뢰, 2000만 발의 실탄, 11만 100발의 수류탄, 프리피야트 강 폴란드 소함대의 함정 51척과 113척 이상의 보조 선박을 노획했고, 전선 장부에는 폴란드군 병사·장교, 경찰과 헌병, 무기를 든 상태로 잡힌 사람들을 포함해 39만 4498명의 전쟁포로가 기록되었다. 포로 수치는 사료마다 다르므로 단일한 정확한 수치가 아니라 출처가 밝혀진 대략적 수치로 제시해야 한다.

군사 단계 뒤 전선의 정치 기관은 임시 지방 자치 기구 수립과 서부 우크라이나 인민회의 선거를 지원했다. 1939년 10월 1일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정치국은 서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벨라루스의 소련 편입 프로그램을 채택해 10월 22일 선거, 10월 26일 인민회의를 확정했고, 10월 27~29일 리비우의 인민회의는 서부 우크라이나에 소비에트 권력 수립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의 재통합을 선언했으며, 11월 1~2일 소련 최고소비에트가 편입 요청을 승인했다. 이 행정적 통합은 1939년 10월의 군정 관련 명령들에 이어지는 단계의 문서화된 부분이며, 순수하게 선의의 '해방'으로도, 사회적·선거적 과정을 동반하지 않은 단순 정복으로도 제시되어서는 안 된다.

서술상의 차이도 남겨 둔다. 티모셴코 전기 자료는 그가 1939년 폴란드 전역에서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우크라이나 전선을 지휘했고 전투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리비우에 들어갔다고 서술하는 반면, 전선 자체의 작전 기간은 9월 17일부터 10월 5일까지로 기록된다. 리비우 입성은 뒷받침되지만, 이 두 기간을 밝히지 않고 혼동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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