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미리오레(Il Migliore)」: 40년간 서유럽 최대 공산당을 이끈 전략가
죽음을 앞두고 쓴 '얄타 각서'로 모스크바로부터의 자율, 다중심주의를 제창하다 (1964)
이탈리아공산당 창립자·서기장. 코민테른 인민전선을 주도했고 1944년 살레르노 전환으로 반파시스트 연정 참여를 이끌었다. 임종 직전 얄타 각서로 다중심주의를 제창, 유로코뮤니즘의 선구가 되었다.
경력 연표
- 1921이탈리아공산당(PCd'I) 창립 참여
- 1927–1964당 서기 — PCI를 서유럽 최대 공산당으로
- 1935–1939코민테른 집행부,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지도
- 1944살레르노 전환 — 반파시스트 연립정부 참여
- 1946–1948제헌의회 '헌법의 아버지', 1948년 암살 미수 생존
- 1964얄타에서 사망 — '얄타 각서'로 다중심주의 제창
관련 역사 사건
- 1934.01–071934년 2월 6일 파시스트 폭동제7차 대회 전쟁 문제 보고자디미트로프의 보고와 짝을 이루는 제국주의 전쟁 준비에 관한 보고를 맡아 새 노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 1936–1939스페인 내전코민테른 스페인 대표 「에르콜리」인민전선 노선의 현장 집행자로 공화국 정부와 PCE 사이를 조율했다
- 1947–1948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PCI의 마셜 플랜 반대와 1947년 5월 연립정부 축출톨리아티가 이끄는 이탈리아 공산당은 마셜 플랜을 반대했으며, 냉전이 격화되자 1947년 5월 데 가스페리 총리에 의해 PCI 각료 전원이 정부에서 축출되었다. 같은 달 프랑스에서도 같은 이유로 토레즈의 PCF 각료들이 축출되었다.
살레르노 전환(1944) — 공산당이 반파시스트 내각에 들어가다
1944년 3월, 이탈리아는 분열되어 있었다. 남부는 연합군 점령 하에, 북부는 나치 독일의 괴뢰정권(살로 공화국) 아래, 그리고 북부 산악 지대에서는 공산당이 주도하는 파르티잔 저항이 전개되고 있었다.
20년간 소련 망명 생활을 해온 팔미로 톨리아티는 모스크바를 떠나 나폴리에 도착했다. 그가 내놓은 전략적 제안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공산당이 바돌리오 원수의 반파시스트 내각에 참여할 것. 군주제 문제는 전후로 미룰 것. 당면 과제는 파시즘 격퇴.
이것이 '살레르노 전환(Svolta di Salerno)'이었다.
이 결정은 당내 강경파를 격분시켰다. 나치에 협력한 전범들과 같은 내각에 앉으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톨리아티의 계산은 냉철했다: (1) 즉각적인 내전을 피하고 파시즘 타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 (2) 합법적 정치 공간에서 PCI의 대중적 기반을 확장할 것, (3) 전쟁이 끝난 후 좌파가 군주제 복귀라는 기정사실 앞에 배제되지 않도록 할 것.
그의 판단은 들어맞았다. PCI는 전후 이탈리아에서 서유럽 최대 공산당으로 성장했고, 톨리아티 자신은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을 제정한 '헌법의 아버지' 중 한 명이 되었다. 제헌의회에서 공산당이 쟁취한 조항들은 지금도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골격을 이룬다.
살레르노 전환은 1970년대 유로코뮤니즘의 선구로 평가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혁명의 포기"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톨리아티 자신은 생애 마지막 글 '얄타 각서'에서 이렇게 답했다: "각국은 각자의 길로 사회주의에 도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