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B를 해체하도록 임명된 마지막 의장
「체키즘의 전통은 근절되어야 하며, 이데올로기로서 존재를 멈춰야 한다」 — 1992년 회고록 『KGB로부터의 해방』에서, 루뱐카를 해체한 마지막 의장이 남긴 선언.
건설기사 출신으로 고르바초프의 신임을 받아 소련 내무장관(1988–1990)과 마지막 KGB 의장(1991년 8월–11월)을 지냈다.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류치코프의 후임으로 KGB를 맡아 외부정보·통신·국경수비대를 분리하고 기관을 해체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남은 조직을 대통령 직속의 소규모 정보기관으로 재편했다. 1991년 12월 미국 측에 모스크바 대사관 도청 장치의 설계도를 넘겨 보수 진영으로부터 '매국'이라는 맹비난을 받았다.
경력 연표
- 1960–73케메로보 건설현장 기술자·관리자
- 1973–85케메로보 시·주 당 간부, 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85–87키로프 주당위 제1서기
- 1987–88케메로보 주당위 제1서기
- 1988–90소련 내무장관
- 1991.3–8소련 대통령 직속 안전보장회의 위원
- 1991.8–11KGB 의장 (마지막)
- 1991.11–92.1공화국간보안국(MSB) 국장
- 1992–97레포르마 재단 부총재
관련 역사 사건
- 1985–1991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KGB 해체 임명된 마지막 의장
- 1988–1991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내무장관 · 바쿠 작전 현장야조프와 함께 바쿠 외곽 지휘소에서 작전을 지휘했으며, 바쿠 내무부 병력 12,000명이 포그롬에 개입하지 않은 책임에도 연루됐다.
- 1991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쿠데타 반대, KGB 해체를 위한 마지막 의장8월 쿠데타 당일 야나예프에게 항의하고 프리마코프와 함께 반대 성명을 발표했으며, 루츠코이와 함께 포로스로 날아가 고르바초프를 모스크바로 복귀시켰다. 쿠데타 실패 후 8월 23일 KGB 의장에 임명되어 기관 해체 임무를 맡았다.
경찰을 인간화하려 한 내무장관
바딤 바카틴은 1937년 케메로보주의 탄광 도시에서 태어난 건설기사였다. 시베리아의 건설 현장에서 당 기구로 옮겨 간 그는 키로프주와 케메로보주의 당 제1서기를 지냈고, 1988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내무장관으로 발탁되었다. 경력 경찰이 아닌 개혁 성향의 당료를 경찰 조직의 정점에 앉힌 파격 인사였다.
그는 내무부의 통계 조작을 공개하고, 언론에 문을 열고, 정치 사찰 기능을 줄였으며, 공화국 내무부에 자율성을 돌려주었다. 치안과 민족분규에 강압이 아니라 정치로 답해야 한다는 그의 노선은 개혁파의 갈채와 강경파의 격분을 동시에 샀다. 군과 KGB의 수뇌부에게 그는 「질서를 허무는 장관」이었고, 1990년 12월 고르바초프가 우선회하며 그를 푸고로 교체한 것은 셰바르드나제의 「독재가 다가온다」 경고와 같은 국면의 사건이었다.
해임된 그는 대통령 안전보장회의에 남았고, 1991년 6월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꼴찌인 3.4%를 얻었다. 정치인으로서의 야심보다 신념의 표시에 가까운 출마였다. 두 달 뒤, 역사는 이 낙선자에게 소련에서 가장 무서운 조직의 마지막 열쇠를 맡기게 된다.
8월 쿠데타 반대와 포로스 비행
1991년 8월 19일 아침, 바카틴은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의 출범을 알게 되자 곧바로 크렘린으로 향해 부통령 겐나디 야나예프를 만났다. 바카틴의 회고에 따르면 야나예프는 '극도로 초조한' 모습이었으며, 고르바초프가 '완전히 무기력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우리가 통치권을 넘겨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바카틴은 "나는 그런 게임에 끼지 않겠다"고 답하고, '소련 대통령의 위헌적 권력 축출과 관련하여' 안전보장회의 위원직 사임서를 야나예프에게 제출했다.
8월 20일, 바카틴은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와 공동으로 언론 성명을 발표해 GKChP의 행위가 위헌임을 선언하고, 시내에서 장갑차를 철수시키며 고르바초프에게 공개 발언 기회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외무장관 알렉산드르 베스메르트니흐는 이 성명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바카틴은 또한 RSFSR 부통령 알렉산드르 루츠코이의 요청으로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과 통화해 백악관(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 건물)을 습격하지 말 것을 촉구했으며, 야조프는 '습격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8월 21일, 바카틴은 루츠코이, 이반 실라예프 RSFSR 총리, 프리마코프 등과 함께 크림반도 포로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들은 포로스에 유폐된 고르바초프를 모스크바로 데려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틀 후인 8월 23일,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바카틴에게 KGB 의장직을 제안하며 '이 무서운 억압 체계를 파괴하는' 임무를 맡겼다.
바카틴의 8월 쿠데타 3일간의 행적은 그가 단순한 고르바초프 측근이 아니라 쿠데타에 대한 원칙적 반대를 행동으로 표현한 몇 안 되는 고위 관료 중 한 명이었음을 보여준다.
루뱐카를 해체한 100일, 그리고 도청도면 전달 사건
쿠데타 이틀 뒤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한 가지에 합의했다. 쿠데타의 본부 노릇을 한 KGB를 다시는 국가 위에 서지 못하게 만들 것, 그리고 그 일을 바카틴에게 맡길 것. 마지막 KGB 의장이 된 그는 100일 남짓한 재임 동안 이 거대 기구를 실제로 갈랐다. 해외정보(훗날의 SVR), 통신 감청, 경호, 국경수비대가 각각 독립했고, 수십만 조직은 축소된 방첩 기관으로 재편되었다. 「체키즘은 이데올로기로서 소멸해야 한다」라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1991년 12월 그는 재임 중 가장 논쟁적인 행동을 했다. 모스크바의 신축 미국대사관 건물에 심어진 도청 장치의 도면을 미국 대사에게 통째로 넘긴 것이다. 고르바초프·옐친과 협의된 신뢰 구축 조치였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지만, 정보기관 사람들은 이를 국가 기밀의 헌납으로 받아들였고 그는 체키스트들의 영원한 배신자가 되었다.
소련 소멸과 함께 물러난 그는 민간 부문에서 조용히 살다 2022년 죽었다. 정치경찰을 실제로 해체하려 한 유일한 소련 관료였다는 것, 그리고 그 해체가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 이 두 사실이 그의 이력의 처음과 끝을 요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