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를람 티호노비치 샬라모프

Варлам Тихонович Шаламов
소련 러시아 1907–1982 ○ 자연사

콜리마 수용소를 산문의 형식으로 증언한 작가

《콜리마 이야기》는 수용소를 교정이나 영웅주의가 아닌 인간성의 파괴로 묘사한다.

좌익 반대파와 가까웠던 젊은 시절부터 체포와 수용소를 겪었고, 1937년부터 콜리마에서 장기간 복역했다. 이후 《콜리마 이야기》로 수용소의 비인간화를 압축된 산문으로 기록했으나, 작품은 생전에 소련에서 거의 출간되지 못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37년 1월 12일, 두 번째 체포

바를람 샬라모프는 1907년 볼로그다의 사제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했다. 1920년대의 그는 당내 좌익반대파에 공감하는 청년이었고, 1929년 2월 19일 레닌의 「대회에 보내는 편지」, 이른바 유언장을 인쇄하던 지하 인쇄소에서 체포됐다. 트로츠키 지지 활동 혐의로 받은 3년형을 그는 북부 우랄의 비셰라 수용소에서 치렀다. 이 첫 체포의 사유가 다름 아닌 레닌의 마지막 문서였다는 사실은,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비극의 예고편과 같았다.

풀려난 그는 모스크바에서 기자와 작가로 일했으나, 대숙청이 절정으로 치닫던 1937년 1월 12일 「반혁명 트로츠키주의 활동」(KRTD) 혐의로 다시 체포됐다. 5년형을 받고 그해 8월 콜리마의 마가단에 내려진 그는 파르티잔 금광의 채굴 막장에 배치됐다. 영하 50도의 갱도, 기아 배급, 12시간 노동의 세계였다. 1943년에는 부닌을 러시아의 고전 작가라고 말한 것이 반소 선동으로 몰려 10년형이 추가됐다.

그를 살린 것은 1946년 수인 의사 판튜호프의 도움으로 들어간 의무보조원(펠셰르) 과정이었다. 병원 근무는 막장 노동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1951년 형기가 끝났으나 콜리마를 떠날 권리는 1953년에야 주어졌고, 완전한 복권은 1956년에 이루어졌다. 첫 체포부터 치면 스무 해 가까이, 콜리마에서만 열일곱 해 가까이를 그는 수용소 세계에서 보냈다. 이 아카이브는 좌익반대파 청년에서 콜리마의 수인이 된 그의 궤적을, 혁명이 제 자식들에게 입힌 상처의 기록으로서 정직하게 남긴다.

'수용소 문학' 거부: 솔제니친과의 논쟁과 '새로운 산문'

샬라모프는 수용소 체험이 문학의 재료이거나 정신적 단련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에게 콜리마는 '완전히 부정적인 경험'이었고, '인간은 더 나빠질 뿐'이었다. 1962년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출간 직후, 샬라모프는 작품의 문학적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수용소는 이가 없고, 담요가 있고, 죄수들이 따뜻한 곳에서 일하는 '가벼운' 수용소라고 지적했다. 이후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 작업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하자 샬라모프는 단호히 거절했고, 솔제니친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방에서 성공하려는 장사꾼'으로 여기게 되었다. 샬라모프가 추구한 '새로운 산문'은 소설도 회고록도 아닌 '문서로서 체험된 산문', 즉 작가가 사건에 직접 참여한 '싸움 그 자체'였다. 그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로 대표되는 19세기 러시아 소설 전통이 콜리마와 아우슈비츠를 막지 못했다고 선언하며 '소설은 죽었다'고 썼다. 대신 벨르이와 레미조프로 이어지는 러시아 모더니즘의 후계자를 자처했고, 《콜리마 이야기》에서 인물의 심리적 발전 대신 극한 상황에서의 행동만을 보여주는 압축된 형식을 완성했다. 그의 산문은 수용소를 영웅주의나 교정의 장소로 미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근본적 반박이었다.

1972년 2월 23일, 문학신문에 실린 편지

콜리마에서 돌아온 샬라모프는 1954년부터 「콜리마 이야기」를 쓰기 시작해 20년 가까이 여섯 연작으로 다듬었다. 그의 산문은 수용소 문학 가운데서도 가장 가차 없다. 구원의 서사도, 시련을 통한 성장도 없다. 「수용소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적 경험의 학교」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고, 그는 이를 장식 없는 짧은 문장의 「새로운 산문」으로 기록했다. 원고는 지하출판으로 돌았고, 1966년부터 뉴욕의 노비 주르날이 그의 동의 없이 조각조각 연재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시집만이 출간될 수 있었다.

1972년 2월 23일, 문학신문에 샬라모프 명의의 편지가 실렸다. 반소 선전에 자신의 이름을 이용하는 서방·망명계 출판을 규탄하고, 「콜리마 이야기의 문제의식은 이미 삶에 의해 해소됐다」고 선언하며 자신을 정직한 소비에트 작가로 규정한 글이었다. 반체제 진영은 이를 배신이자 문학적 죽음으로 읽었다. 그러나 기록은 더 복잡한 그림을 보여 준다. 샬라모프는 수첩과 지인들에게, 편지는 자신이 쓴 것이며 동의 없이 작품을 조각내 정치 상품으로 소비하는 망명 출판에 대한 분노가 진심이었다고 남겼다. 그는 반체제 운동의 상징이 되기를 원한 적이 없었고, 자신의 증언이 냉전의 탄약으로 쓰이는 것을 거부했다. 이 아카이브는 이 편지를 강요된 굴복설로 단순화하지도, 순수한 자발성으로 미화하지도 않고, 본인의 설명 그대로 기록한다.

솔제니친이 「수용소군도」의 공저를 제안했을 때도 그는 거절했다. 두 증언자의 미학과 정치는 갈라섰고, 샬라모프는 끝까지 문서적 정확성과 문학적 절제의 길을 택했다. 만년의 그는 시력과 청력을 잃은 채 1979년 문학기금 양로원에 들어갔고, 1982년 1월 정신신경 요양시설로 강제 이송된 지 사흘 만인 1월 17일 폐렴으로 숨졌다. 「콜리마 이야기」가 조국에서 온전히 출간된 것은 1988–1989년, 페레스트로이카의 지면에서였다. 오늘날 이 연작은 20세기 러시아 산문의 가장 준엄한 성취 중 하나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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