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훈장 9회: 전시 무기생산에서 스푸트니크까지, 소련 군산복합체를 35년간 떠받친 조직자
R-7 발사가 성공하자 누군가 연회를 넌지시 꺼냈다. 랴비코프는 국가 예산이 아닌 각출로 자리를 마련하게 한 뒤, 손풍금을 집어 들고 러시아 왈츠와 「카튜샤」를 신나게 연주했다. 코롤료프가 코냑을 따르며 건배를 청하자, 그는 활짝 웃으며 외쳤다. "노래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이바노보 직물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행정가로 올라선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무장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으로서 공장 동부 이전과 무기 증산을 지휘했고, 1945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을 이끌었고, 1957년 R-7 미사일 및 스푸트니크 1호 발사를 승인한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소련 우주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후 13년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 군수-민수 자원 배분을 조율하며 브레즈네프기 계획경제의 핵심 축으로 일했다.
경력 연표
- 1924–1929이바노보주 직물공장 노동자, 이후 콤소몰·당 지역 간부
- 1929–1937레닌그라드 기술원·군사기계연구소·해군사관학교에서 공학 수학
- 1937–1939볼셰비크 공장 설계기사, 당위원회 서기,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당조직자
- 1939–1950무장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이후 제1부위원 — 전시 공장 이전·무기 증산 지휘
- 1950–1953소련 각료회의 제3총국장 — 모스크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 주도
- 1955–1957각료회의 특별위원회 의장 — R-7 및 스푸트니크 1호 국가위원회 주재
- 1961–1962, 1965–1974고스플란 제1부의장 — 군수-민수 자원 배분과 경제 계획 조율
관련 역사 사건
전시 무기 공장 이전과 증산
1941년 독일의 침공 직후, 소련의 군수공업은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동부 이전 작전에 돌입했다. 랴비코프는 무장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으로서 이 공장 대피의 실무를 총괄했다. 1941년 하반기에만 1,500개가 넘는 공장이 우랄·시베리아·중앙아시아로 옮겨졌고, 랴비코프는 기차 편성에서 조립 라인 재가동까지 공정 전체를 조율했다. 공장들은 도착 즉시 가동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기계가 아직 지붕도 없는 건물에 설치된 채로 무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의 임무는 이전에 그치지 않았다. 1942~1943년 소련군이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앞에서 버티는 동안 랴비코프는 신형 전투기, 전차포, 자동화기의 신속한 설계·시험·양산 체계를 구축했다. 이 시기 소련은 항공기 엔진과 야포 같은 주요 품목에서 독일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랴비코프의 공적은 단순한 관료적 조정이 아니었다. 그는 당 중앙위원회와 국방위원회 앞에서 수시로 보고하는 한편, 설계자·공장장·철도 책임자들과 직접 부딪치며 문제를 풀어나갔다.
1945년 9월 16일, 그는 '무기의 생산 조직, 새로운 전투 장비의 창제와 습득, 그리고 소련 육·해군에 대한 그것들의 보장'이라는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쟁 기간 중 그가 받은 네 개의 레닌 훈장(1942, 1944, 1945, 그리고 전쟁 직전인 1939)은 전시 소련 군수행정에서 그가 차지한 중심적 위상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