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드나야 볼랴에서 시작해 치타 공화국을 이끈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중 한 사람
옛 티플리스 노동자들은 이렇게 회고했다. 「논쟁이나 토론이 벌어질 때면 동지들은 모두 쿠르나톱스키에게 물었다. 그의 결론과 판단은 언제나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쿠르나톱스키는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 해방' 그룹과 함께했으며, 미누신스크 유형지에서 레닌을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에 서명했다. 1900년 이스크라의 카프카스 대표로 티플리스에 파견되어 RSDLP 티플리스 위원회를 결성했고, 그곳에서 젊은 스탈린의 '당적 스승' 역할을 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치타에서 노동자·병사·코사크 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무장봉기를 이끌어 이른바 '치타 공화국'을 수립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종신 카토르가로 감형된 뒤 일본으로 탈출, 파리에서 망명 중 44세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887–1889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 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대학에서 제적·유형
- 1892–1897취리히 공대 졸업(화학공학),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 그룹 참여
- 1898–1900미누신스크 유형, 레닌과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 서명
- 1900–1901이스크라 카프카스 대표, RSDLP 티플리스 위원회 결성
- 1904야쿠츠크 정치유형자 무장항의 지도, 아카투이 카토르가 수감
- 1905–1906치타 노동자·병사·코사크 소비에트 조직, '치타 공화국' 무장봉기 지도, 《자바이칼스키 라보치》 편집
- 1906–1912사형 선고 후 종신 카토르가 감형, 일본 탈출, 파리 망명 중 사망
관련 역사 사건
치타에서의 혁명 활동과 진압 (1905–1906)
1905년 가을 치타에서 쿠르나톱스키는 노동자 봉기를 준비한 사회민주당 조직에 합류했다. 11월 사회민주주의자 대회에서 선출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병사·코사크 대표 소비에트의 조직에도 참여했다. 다만 소비에트와 무장 노동자 민병대의 의장은 안톤 코스튜슈코발류자니치였다. 12월 7일(구력 11월 24일)부터 쿠르나톱스키가 편집한 기관지 「자바이칼 노동자」가 발행되어 당의 정치 활동을 넓혔다. 이 신문은 8천에서 1만 부를 찍었다.
그는 선전과 조직에 그치지 않고 12월 20일(구력 12월 7일) 아카투이 유형감옥에 수감된 수송선 「프루트」의 수병 15명을 석방한 대표단을 이끌었다. 치타 봉기가 고립되고 군사 원정대가 접근하자 당 위원회와 노동자 민병대 소비에트는 정면 교전을 피하고 유격 투쟁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렌넨캄프 장군의 원정대는 1906년 2월 4일(구력 1월 22일) 저항 없이 치타에 들어왔으며, 진압 뒤 쿠르나톱스키를 포함해 약 400명이 체포되었다. 1906년 3월 군사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4월 15일(구력 4월 2일) 무기한 유형노동형으로 바뀌었다. 그는 6월 3일(구력 5월 21일) 네르친스크 시립병원에서 탈출했다. 진압은 다른 참가자에게도 사형·유형형을 부과하고 철도 노동자 400명 이상을 해고·추방하는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