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바빌론의 처녀 공물」로 동의 연령 인상을 이끈 탐사 언론인
1885년 열세 살 소녀를 「사들이는」 잠입 취재로 아동 성매매를 폭로해 동의 연령을 16세로 올린 형법 개정법 통과를 도왔으나, 유괴죄로 3개월 복역했다.
노섬벌랜드의 회중교회 목사 아들로 태어난 영국의 언론인. 1871년 스물두 살에 《노던 에코》 편집장이 되었고, 1880년 《펠멜 가제트》로 옮겨 1883년 편집장이 되었다. 1885년 아동 성매매를 고발한 「현대 바빌론의 처녀 공물」 연재로 동의 연령을 13세에서 16세로 올린 이른바 「스테드 법」 통과를 이끌었으나, 취재 과정의 소녀 「매입」으로 유괴죄 판결을 받았다. 「신저널리즘」으로 영국 타블로이드의 길을 열었다. 1912년 타이태닉호 침몰 때 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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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912
독립 활동대표
이념·선전
관련 역사 사건
「처녀 공물」과 1885년 형법 개정법
그는 어머니가 군 주둔 도시의 매춘 여성에게 강제 검진을 받게 한 전염병법에 맞서 지역 운동을 이끌던 것을 어린 시절의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꼽았다. 1876년 그 자신도 전염병법 폐지 운동에 뛰어들어 페미니스트 조지핀 버틀러와 가까워졌고, 이 법은 1886년 폐지되었다. 신앙에서 나온 도덕적 사명감으로 일한 그는 《노던 에코》 편집장 시절 불가리아 학살 반대 운동으로 이름을 얻었고, 1880년 총선에서 글래드스턴의 압승에 큰 몫을 했다는 평을 받았다.
1885년 그는 《펠멜 가제트》에 아동 성매매를 고발하는 네 편의 연재 「현대 바빌론의 처녀 공물」을 실었다. 취재를 위해 굴뚝 청소부의 열세 살 딸 일라이자 암스트롱을 「사들였고」, 기사에서는 「릴리」라고 불렀다. 신문은 원가의 스무 배에 거래될 만큼 팔렸고 사옥은 1만 명에게 에워싸였다. 연재는 동의 연령을 13세에서 16세로 올린 1885년 형법 개정법의 통과를 앞당긴 것으로 평가되지만, 그는 소녀의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괴죄가 인정되어 3개월을 복역했다. 바로 이 법에 래부셰어의 「중대한 외설」 조항이 덧붙었다.
「저널리즘에 의한 정부」를 내세운 그의 「신저널리즘」은 신문이 여론과 정책을 움직이는 방식을 바꾸었다는 평을 받는다. 연재는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에도 영감을 주었다. 그는 1912년 카네기 홀 평화 회의에 가려고 타이태닉호에 탔다가, 여자와 아이들을 구명정에 태우고 자기 구명조끼를 남에게 준 뒤 숨졌다. 시신은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