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폴란드 10월로 복귀해 '폴란드식 사회주의 길'을 실험한 민족공산주의자
1956년 10월 폴리트뷰로에서 — 「총검으로 통치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통치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1905년 오스트리아 분할령 갈리시아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네 살부터 배관공으로 일했다. 1926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했고 1943년 지하 폴란드 노동자당 서기장이 되었다. 1948년 '우익 민족주의적 일탈'로 밀려나 1951~1954년 옥살이를 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시위가 유혈 진압된 뒤 10월 20일 제1서기로 선출되었고, 소련군의 진격에는 저항하되 동맹은 유지한다는 입장을 관철해 소련이 물러섰다. 1967~68년 반유대 캠페인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지지로 개혁 노선은 끝났고, 1970년 12월 가격 인상에 항의한 그단스크·그디니아 조선소 노동자들에게 군대의 발포를 명령했다. 사인은 폐암이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3–1947 정치·당 지도 · 폴란드 통일노동당
- 1948–1970 정치·당 지도 · 폴란드
경력 연표
- 1926폴란드 공산당 입당
- 1934–35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43–48폴란드 노동자당 서기장
- 1948–51'민족주의적 일탈'로 숙청·해임, 1951년 체포
- 1954–56석방·복권, 폴란드 10월로 복귀
- 1956–70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
- 1970.12가격 인상 반대 파업 유혈 진압, 심장발작 뒤 12월 20일 해임
관련 역사 사건
- 1944–1949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폴란드노동자당 서기장1946년 11월 「폴란드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강연했고, 1947년 코민포름 창설에 유보를 표했으며, 1948년 9월 「우익 민족주의 편향」으로 해임되어 1951년 체포되었다.
- 1944–1948폴란드: 루블린 위원회에서 통일노동자당까지노동자당 서기장, 「폴란드의 길」1945년부터 소비에트 체제와 다른 폴란드의 길을 말했고 1947년 코민포름 창설에 유보를 표했다. 1948년 9월 「우익 민족주의 편향」으로 해임되었고, 1951년 체포되어 재판 없이 1954년까지 구금되었다.
- 1947–1948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거부를 강요받은 폴란드원조에 관심을 보였으나 결국 거부해야 했던 폴란드 지도자였다.
- 1956.02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폴란드 10월의 지도자1956년 10월 제1서기로 복귀해 흐루쇼프의 군사 개입 위협을 협상으로 막아내고 폴란드식 사회주의를 실험했다.
- 1956.06포즈난 봉기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10월 21일 제1서기로 복귀해 포즈난을 당의 잘못된 정책이 낳은 노동자 봉기로 규정하고 재판 피고들의 사면을 이끌었다.
- 1968프라하의 봄바르샤바조약 동맹폴란드 지도자로 침공에 가담했다.
지하 폴란드 노동자당 지도와 국민평의회 창설, 1942~1944
1941년 독일의 소련 공격 뒤 고무우카는 재건된 지하 폴란드 노동자당(PPR)에 들어가 포트카르파체 지역에서 '베스와프'라는 지하 가명으로 당 조직을 세웠다. 1942년 7월 파베우 핀데르의 주선으로 점령된 바르샤바로 왔고, 8월 바르샤바 지역위원회 서기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자 그 직을 넘겨받았으며, 9월에는 PPR 임시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말 초대 서기 마르첼리 노보트코가 살해된 뒤에는 볼레스와프 모워예츠를 둘러싼 당내 조사에 참여했고, 그 조사는 모워예츠의 처형으로 끝났다. 1943년 1월 그는 파베우 핀데르, 프란치셰크 유지비아크와 함께 당의 새 지도부에 들어갔다.
고무우카는 당의 주요 이론가로서 1943년 강령 소책자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를 집필하고 출판·편집 실무를 지휘했다. 1943년 2월에는 바르샤바에서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 대표부 및 국내군과 협상을 이끌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대표부가 4월 28일 협상을 중단했다. 1943년 11월 23일 파베우 핀데르와 마우고자타 포르날스카가 게슈타포에 체포된 뒤 그는 PPR 서기장(총책)으로 선출되었다. 폴란드어·영어 자료는 11월 23일로, 러시아어 자료의 정보상자는 11월 14일로 적어 날짜에 차이가 있다.
그는 모스크바의 사전 승인 없이 당 지도부를 설득해 공산주의 진영이 주도하는 준의회 기구인 국민평의회(KRN) 구상을 관철했고, 1943년 12월 31일 비에루트를 의장으로 하여 이를 창설했다.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그룹이 경쟁적 구상을 밀고 있었으나, 그는 점령지 안의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폴란드 현실을 더 잘 안다고 주장했다. 또한 좌파 사회주의자·농민정당과 협상해 이들을 KRN에 끌어들여 공산 권력의 국내적 사회 기반을 넓히려 했는데, 이는 붉은 군대의 진주에 의존하려 한 비에루트와 충돌했다. 이 노선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에서 비에루트 쪽으로 정리되었고, 모스크바는 PPR이 이끄는 지하 조직에 대한 자금과 무기 지원을 보류했다. 그래도 1944년 중반 무렵 모스크바 진영은 PPR과 KRN, 고무우카의 우위를 인정했다. 1944년 7월 20일 소련군이 부크강을 넘은 뒤 21일 폴란드 민족해방위원회(PKWN)가 구성되었고, 고무우카를 비롯한 PPR 지도부는 바르샤바를 떠나 소련 통제 아래의 루블린으로 이동해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된 8월 1일 도착했다.
폴란드식 사회주의 길
고무우카의 가장 뚜렷한 역사적 공헌은 '폴란드식 사회주의 길'이라는 개념을 정식화하고 1956~58년에 실제 정책으로 추진한 것이다. 1948년 그가 '민족주의적 일탈'로 숙청된 핵심 이유도 바로 이 문제였다. 소련 모델을 그대로 이식하는 데 반대하고 폴란드의 역사적 조건에 맞는 경로를 주장한 것이다. 1956년 10월 제1서기로 복귀한 직후, 그는 세 가지 영역에서 재빨리 움직였다. 첫째, 농업 집단화를 사실상 중단하고 스탈린 시절 강제로 만들어진 국영·협동농장 대부분을 해체하여 폴란드 농지의 약 85%를 개인 농가에 되돌려주었다. 둘째, 노동자평의회 제도를 도입해 공장 단위에서 생산·분배에 대한 자주적 결정권을 실험했으며, 이는 유고슬라비아 이외의 사회주의권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셋째,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검열을 완화하여 문화·지성계에 일시적이나마 실질적인 자유 공간을 열었다. 1956년 12월에는 소련군 주둔의 법적 지위를 규정하는 협정을 체결해 주둔군의 사전 통보 없는 이동을 금지하고 폴란드 당국의 통제권을 명문화했는데, 이는 바르샤바조약국 가운데 최초의 사례였다. 고무우카는 이 개혁들을 두고 '사회주의 건설에는 국민적 특수성과 역사적 전통을 반영한 다양한 길이 있을 수 있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이 노선은 당내 보수파의 끊임없는 반발을 받았고 1960년대 들어 점차 후퇴했지만,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공식 강령으로 1980년대까지 유지되며 동유럽 개혁공산주의의 중요한 준거점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