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의 정치적 후견인, 국방산업을 관장한 당 서기, 우스티노프를 꺾고 T-72를 관철시킨 실무형 관료
T-72 전차가 시속 70킬로미터로 질주하며 불꽃을 튀기자, 그레치코 원수가 말했다. "보고할 것도 없네. 생산에 들어가야 해." 곧바로 브레즈네프에게 전화를 걸어 덧붙였다. "우스티노프? 엿이나 먹으라지, 그 작자 헛소리랑 같이!"
야코프 랴보프는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1971–1976)와 CPSU 중앙위원회 서기(1976–1979)로서 소련 군수산업을 총괄한 당-국가 관료다. 우랄 기술자 출신으로 키릴렌코의 발탁을 받아 스베르들롭스크 당 조직을 장악했고, 보리스 옐친을 발굴해 후계자로 추천했다. 중앙당 서기로 옮겨 국방을 담당하자 우스티노프와 T-72 전차 채택을 두고 정면 충돌했으며, 그레치코 원수의 지지로 T-72를 소련 주력 전차로 관철시켰다. 이후 국가계획위 제1부의장, 대외경제관계위 의장, 각료회의 부의장, 주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 및 리즈코프와의 갈등으로 물러났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6–1960 사회운동·조직 · 소련 · 당 서기국 · 조직인사
경력 연표
- 1943–1944제9공장 선반공
- 1946–1960스베르들롭스크 터보모터 공장 기술자·설계국장·공장장·당위서기
- 1960–1963CPSU 스베르들롭스크 오르조니키제 구당위 제1서기
- 1963–1966CPSU 스베르들롭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66–1971CPSU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2서기
- 1971–1976CPSU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71–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76–1979CPSU 중앙위원회 서기 (국방·군수산업 담당)
- 1979–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제1부의장
- 1983–1984소련 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
- 1984–1986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화학공업 담당)
- 1986–1990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관련 역사 사건
방위산업 담당 서기의 무기 개발 논쟁
1976년 중앙위원회 서기가 된 랴보프는 방위산업 부문과 군·내무부·국가보안위원회를 담당하는 당 중앙기구 부서를 맡았다. 그는 회고 인터뷰에서 매년 약 40개 도시와 150개 연구·설계 기관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여러 설계국이 같은 목적의 무기를 병행 개발하면서 예산과 설계 인력이 분산되고, 충분히 시험하지 않은 장비가 생산에 들어가 사고와 재난을 낳는다고 판단했다. 1977년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총참모장 등과 모스크바의 방공·미사일방어 체계를 점검한 뒤, 그 체계가 여전히 작동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으나 국방장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는 과거에는 그런 체계조차 없었다고 답했다.
랴보프는 오래된 전차의 보관비와 무기 규격의 중복을 줄이자고 주장했고, 우주선 도킹 실패 원인을 규명하기 전 유인 비행을 중단하자고 했다. 그는 소련의 한 발사 비용을 당시 1억 8천만 루블로 제시하며, 이 비행 중단 주장은 자신이 관철했다고 회고했다. 1978년 말에는 국방부의 주문량과 방위력을 낮추지 않으면서 방위산업 작업 일부를 줄여 1979년에 80억 루블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검토안을 작성했다. 그는 이 제안을 수슬로프에게 보고했지만, 실제로 채택됐는지는 인터뷰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우스티노프와의 이러한 의견 충돌은 랴보프의 중앙위원회 서기 임기 종료와 맞물렸다. 이후 그는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의장으로 옮겼다. 인터뷰는 논쟁의 당사자인 랴보프의 회고이므로, 그의 평가와 주장으로 귀속해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