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흐리산포비치 루토비노프

Лутовинов, Хрисанфович Юрий

루간스크의 금속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 노동반대파 지도자

1920~1921년 노동반대파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산업의 집단적 관리와 노동자 권익을 옹호하다 10차 당대회에서 레닌 노선에 패배했고, 신경제정책과 당 관료화에 환멸하여 1924년 5월 7일 권총으로 자살했다.

1887년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루간스크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루간스크 탄약 공장의 금속 선반공으로 일했다.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아르한겔스크와 야쿠츠크 현으로 유배되어 두 차례 탈출했으며, 1907~1910년 반동 시기에는 사회혁명당에 속했다가 볼셰비키로 돌아왔다. 1917년 3월 루간스크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8월 금속노동조합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1월 전러시아 제헌의회 의원이 되었다. 1918년 3월 루간스크 지역 인민위원회를 이끌었고 도네츠-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인민위원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이후 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 위원과 통신노동조합 의장을 맡았다.

다른 이름: 이반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노동조합 논쟁과 노동자반대파 활동

1920년 3월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제9차 대회에서 루토비노프는 알렉산드르 쉴랴프니코프의 노동조합 관련 테제를 발표했다. 그는 산업에서 개인 지휘에 반대하고 집단적 운영을 주장했지만,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자 통제를 즉각 실현해야 한다는 쉴랴프니코프의 강조와는 달랐다. 노동자가 산업을 통제하려면 먼저 일정한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9월 제9차 당협의회에서는 노동자반대파의 주요 발언자로 나서 노동 민주주의의 확대, 임명제의 폐지, 당의 엄격한 정화를 요구했다. 이 제안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협의회는 분파투쟁을 막기 위한 통제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1920년 가을 그는 당의 노동조합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우크라이나 공산당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논쟁에 개입했다. 12월 노동자반대파 강령에 서명하지 않았지만, 노동조합과 노동자 및 경제 정책에 대한 당의 노선을 계속 비판하고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선거에서 반대파를 도왔다.

1921년 1월 말, 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다수파와 노동조합 문제에서 견해가 크게 달랐던 루토비노프는 평의회에서 물러나겠다고 요청했다. 지도부는 노동조합 행정직에서의 해임은 받아들였지만 공장 노동으로 돌아가려는 요청은 거부했다. 3월 그는 베를린으로 파견되어 소련 대사관의 재정 운영을 조사했으며, 그곳에서 크론슈타트 반란의 무력 진압을 지지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내 반대파 활동과 함께 이 행적은 그가 노동자 권리와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주장하면서도 당의 정책 및 국가의 무력행동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