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노비 보리소비치 카츠넬손

Зиновий Борисович Кацнельсон
소련 국가기관 마르크스-레닌주의 소련 벨라루스 (유대계) 1892.11.24.–1938.3.10. ✕ 처형

OGPU 경제국장과 국경경비 총책, 우크라이나 부내무인민위원을 지낸 체키스트

보브루이스크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했다. 1917년 국제주의파 사회민주당원을 거쳐 내전기 체카 특별부에서 일했다. 아르한겔스크 체카 의장, GPU·OGPU 경제국장, 자캅카스 전권대표, 국경경비총국장을 차례로 맡았다. 1930년대에는 하르키우 GPU 책임자를 거쳐 우크라이나 GPU 부의장과 부내무인민위원을 지냈고, 우크라이나 보안국은 그를 홀로도모르 책임자 명단에 올렸다. 1937년 굴라크 부국장이 되었으나 7월 체포되어 1938년 3월 10일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법학도는 어떻게 체키스트가 되었나?

카츠넬손은 1892년 민스크현 보브루이스크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을 마치고 1915년까지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에서 4년을 공부했고, 라자레프 동양어 학원을 1년 다닌 뒤 준위 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3~9월에는 사회민주노동당 국제주의파 당원이자 모스크바 군관구 특임 위원이었다. 사촌으로 전해지는 레이바 펠드빈, 곧 뒷날의 알렉산드르 오를로프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학교와 같은 분파를 거쳤다.

내전이 시작되자 군사 통제부 수사관과 체카 특별부 고위 수사관이 되었고, 제3군과 남서전선, 제12군의 특별부를 차례로 맡았다. 군대 안의 반혁명을 잡는 일이었다. 오를로프도 제12군 특별부에서 일했다. 1921~1922년에는 북부 지방에서 체카 전권대표로서 아르한겔스크 현 체카를 이끌었다.

1920년대 그는 무슨 일을 맡았나?

1922년 9월부터 1925년 4월까지 그는 GPU·OGPU 경제국장이었다. 경제 기관의 범죄와 ‘파괴 행위’를 맡는 부서로, 1924년 5월 오를로프가 여기 들어와 정보기관 경력을 시작했고 레프 미로노프도 같은 때 부서장이 되었다. 1925년 자캅카스 전권대표로 옮겨 갈 때 오를로프도 그를 따라갔다.

1926~1929년에는 OGPU 국경경비·군대 총국장으로 소련의 국경 부대를 지휘했다. 1929년 북캅카스로 내려가 집단화를 조직했고, 1930년 국립은행 이사를 지낸 뒤 모스크바주 OGPU 부전권대표가 되었다.

우크라이나와 그의 마지막은 어떠했나?

그는 기근이 한창이던 1933년 하르키우주 GPU 책임자로 우크라이나에 왔다. 1934년 1월 우크라이나 GPU 부의장, 7월 우크라이나 부내무인민위원이 되었고, 같은 해 제17차 당대회에 하르키우 대표로 참석했다. 우크라이나 보안국은 그를 홀로도모르 조직자 명단에 올렸다.

1937년 4월 그는 굴라크 부국장 겸 드미트롭스크 수용소 소장으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맡았다. 그러나 야고다 시대 간부를 치우는 숙청 속에 7월 17일 체포되어 1938년 3월 10일 총살되었다. 친척이자 후원자를 잃은 오를로프는 그달에 그 소문을 들었다. 카츠넬손은 1957년 7월 9일 복권되었다.